나귀를 타신 예수님과 성전에 대해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과 성전에 대해서

 

 

마가복음 111-6절에서『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를 자주 들르셨으므로 그 지역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주변에 누가 나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이 그 지역에 도착해서 주변을 다니셨을 것이다. 베다니에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문둥병 환자 시몬이 살고 있던 마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제자 둘에게 그런 지시를 한 것이다.

나귀를 타는 예수님은 많은 의미를 가지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나귀는 부정한 동물로서 제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출애굽기 1313절에서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라고 말한다. 앞부분(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을 히브리어로 보면,

וְכָל־פֶּ֤טֶר חֲמֹר֙ תִּפְדֶּ֣ה בְשֶׂ֔ה 

『웨칼(모든) 페테르(첫태생) 하모르(나귀의) 팁데흐(너는 대속할 것이라) 브세흐(양으로)』나귀의 첫태생은 목을 꺽어 죽인다. 그런데,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므로 제물로 사용되지 않지만,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양을 대신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출애굽 당시에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을 구하기 쉽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귀 첫새끼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귀새끼의 주인은 어차피 죽여야 하는 동물인데,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다.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사람이 손을 대거나 타거나 해서는 안되었다. 초태생이 태어나면 칠일 동안은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이 되면 구별하게 된다. 그래서 목을 꺽거나, 제물로 바쳐질 때까지는 매여있게 된다. 출애굽기 1312절에서『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초태생인 나귀새끼를 타는 예수님의 모습은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초태생(장자)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모든 세상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준다. 실제 출애굽 전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를 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외한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죽은 것이다. 희생 양이 대신 죽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귀를 탄 예수님은 죄인(장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둘째, 나귀새끼는 어린양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한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18-10절에서『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장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해도 누가 크냐 라고 논쟁한 제자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유대인들은 세상을 뒤엎을 메시야가 왔으므로 다윗을 언급하며,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의 상태임을 비유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셨다.

마가복음 1115-17절에서『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기도하는 것인데, 유대 지도자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성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이제 돌성전 대신에 다른 성전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19-21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다른 성전을 주는데, 이전의 돌성전은 다 무너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돌성전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죽어야 할 육체를 의미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돌성전)는 첫사람 아담을 예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하늘로부터 오는 성전)는 마지막 사람 아담을 상징한다. 따라서 돌성전(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A.D. 70년 경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가복음 131-2절에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성전은 교회의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전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이 모일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이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을 하면 여전히 그들은 돌성전에 머물고 있으며, 유대 율법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16-17절에서『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은 성전이 세워지지 않은 것이다. 성령세례는 곧 부활을 의미한다. 성령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다. 로마서 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오늘날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자는 여전히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이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현재적 재림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게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유대 땅에 태어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당시 성전 안에서 물건을 매매하듯이,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사업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앞세워 장사하는 격이다. 교회를 주식회사처럼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지도자들이 권력과 타협하고, 정치한 것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유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은 많은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없고,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 더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타락한 것은 아닐지라도, 오늘날 교회가 율법주의 인본주의에 물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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