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다음카페: 진리의 선교회)

 

  

 

. 하나님나라.................................................................. 1

1. 삼위일체의 하나님 나라.......................................... 1

2. 성전 속의 하나님 나라........................................... 2

3.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10

4. 교회 속의 하나님 나라...........................................16

5.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다...................................19

 

. 천사들...................................................................... 27

1. 범죄한 천사들.................................................... 27

2. 에덴동산 이야기................................................. 32

3. 사탄과 그의 사자들.............................................. 40

4. 수호천사들........................................................ 54

 

. 율법 속에 던져진 인간들 ................................................ 55

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심..................................... 55

2.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심...............................58

3.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61

4.    율법 속의 그리스도................................................64

5.    율법과 성령의 법................................................... 68

6.    율법주의를 통한 폭력.............................................. 72

. 하나님의 구원계획......................................................... 74

1. 그리스도의 예정....................................................74

2. 물질세계 창조.......................................................80

3. 인간 창조............................................................ 85

4. 믿음과 언약......................................................... 90

5. 계명.................................................................. 96

6. 결혼제도 비유......................................................103

7. 이스라엘과 이방인.................................................108

 

. 그리스도.................................................................109

1. 삼위일체..........................................................109

2.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117

3. 십자가의 죽음..................................................123

4. 부활...............................................................126

5. 재림...............................................................130

 

.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133

1. 그리스도의 일꾼..................................................133

2. 복음 전파의 사명.................................................136

3. 성령의 은사........................................................139

 

. 천년왕국과 지옥.........................................................144

1. 천년왕국..........................................................144

2. 지옥과 음부......................................................147

3. 영적 전쟁.........................................................155

4. 구원받는 자의 삶................................................160

 

. 심판........................................................................ 166

1. 하나님의 공의................................................... 166

2. 백보좌 심판...................................................... 167

3. 둘째 사망......................................................... 169

 

 


. 하나님 나라

1. 삼위일체의 하나님 나라

영적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아무리 잘 설명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눈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면 조금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난 성도이다. 성부 하나님을 첫째하늘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하늘, 성령으로 난 성도를 셋째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이다.

(1)첫째하늘

첫째하늘은 성부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영으로 임재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아무도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6 16절에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2)둘째하늘

둘째하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영의 몸을 입고 임재하시는 아들의 나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24 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골로새서 1 12-13절에서『우리로 하여금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3)셋째하늘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태복음에서 천국(하늘나라)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첫째하늘과 둘째하늘과 셋째하늘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행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세가지의 형태로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2. 성전 속의 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12 1-5절에서『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휘테오)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게오르고스)에게 세로 주고(에크디도미)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 때가 이르매(토 카이로)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아티마조)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악한 농부의 이야기이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냈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으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축복이 넘어간다는 것이다

12 12절에서는『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고, 새로운 성전(부활)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냐 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오히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그들에게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라고 묻는다. 종교지도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침묵 속에는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하늘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포도원 주인)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다.

표면적인 비유를 통해서 이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한 사람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집주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포도원은 집이라는 개념이 된다. 집은 성전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았는데, 성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에서 성전의 개념은 이스라엘로 표현되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전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즉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헬라어 휘테오는 심다라는 의미다. 성전(옛사람:돌성전)을 심령 속에 심은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농부들에게 세를 준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 속의 성전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에크디도미는 빌려주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성전을 심어놓았는데, 아직 나의 것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심령 속의 성전은 세를 통해서 넘겨받은 포도원이다. 게오르고스는 농부로 표현되었지만, 땅을 경작하는 자이다. 심령 속의 밭을 경작하는 것이다. 굳었던 땅을 갈고 옥토를 가꾸는 것이 농부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성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농부이나 땅을 갈지 않은 그런 상태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을 말해준다.

농부가 땅을 경작하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주인으로 부터세를 받았으니, 농부가 주인에게 열매를 바쳐야 한다. 열매는 심령 속의 성전을 통해서 영생(그리스도)을 얻는 것이며, 그 영생이라는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열매를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을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며,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말이다. 하나님도 농부이고, 세를 물려받은 성도 역시 농부라는 것이다. 농부는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아포데메오는 집밖으로 나가다, 외국을 나가다 라는 의미다. 집은 성전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심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성전 밖에 있는 것이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하나가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이 그의 영을 흙에 가두어 분리되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이 밖에 계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들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있음에도 장사하는 소굴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를 준 그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이런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주여 라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밖에 나가셨던 집주인이 때가 되면 찾아오신다. 포도원의 소출을 받으러 종을 보내시는 것이다. 토 카이로(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시간이 된다. 하나님이 심령 속으로 들어오면 성도가 카이로스(영생)가 되지만, 하나님이 밖에 있으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크로노스가 된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포도나무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님은『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니』에서, 가지에서 열매(그리스도)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영생의 열매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는 자가 안식에 있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이신 그리스도로 열매를 맺으므로, 이제 십일조가 완성이 된 것이다. 십일조는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내고, 그것을 통해서 전체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전체가 다 완성이 된 이후에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말은 열매(영생)의 의미를 모르는 자가 된다. 세를 받은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성령)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의 열매가 있다면, 그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사야 5 1-3절에서『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사야 5 7절에서는『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자기의 의에 도취해서 그리스도를 오히려 십자가에 죽게 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보낼 것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당시 유대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심령 속에 한 선지자를 보내주는데, 사람들은 거부하는 것이다. 첫번째 종을 때리고 돌려보냈고, 다른 종도 때리고 능욕하고(아티마조) 돌려보냈다. 아티마조는 불명예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기 전에 종들을 보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상징한다. 이 종들(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 약속은 창세기 3 15절에서 나타난다.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선지자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므로 때리고 능욕하는 것이다.

세번째 종을 보냈더니,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그런데, 누가복음 20 12절에서는『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세번째 종에서, (3)이하는 의미는 완전한 것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의 의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날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23 33-34절에서『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제사장 그룹,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며, 결국 죽이기까지 했다. 이 말에서, 오늘날 교회 신도가 볼 때 분노스럽지만, 신도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을 때는 의아스러울 것이다. 하나님은 심령 속에 성전(옛성전)을 세워 세를 주고 갔지만,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해도 그들을 오히려 핍박하고 능욕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교회라는 건물에 모여서 날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지경에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2 6절에서『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이 말과 누가복음 20 13절에서『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티 포이에오)』개역개정에는 “어찌될까” 라고 번역되었지만, 헬라어로 보면 “어떻게 완성하지” 라는 것이다. 포이에오는 완성하다, 창조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내가 포도원을 심었는데, 즉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심었는데, 어떻게 이를 완성하지 라는 말이다. 어떻게 열매를 맺어서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해 줄까 라는 고민이 섞여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하기 위해서는 농부는 아들을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죽을 줄 알면서 보내는 것이다. “존대한다(엔트레포)”는 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드리는 것이 회개이다. 심령 속에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가 회심하는 자요,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대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 7-9절에서,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클레로노모스)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논의하고 분석해보니, 이 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 결론내리는 것이다. 클레로노모스는 클레로스(제비뽑기)와 노모스(율법)의 합성어이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율법을 통해서 하늘의 상속자가 되고자 하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성전 밖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에서, 와서(에르코마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육적인 자아(악한 농부)가 진멸당하고 영적인 자아(다른 사람)가 살아나면 포도원(새성전)을 주는 것이다. 진멸당하는 것은 옛성전의 파괴이며,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육적 자아)이 죽는 것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진멸당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옛성전(옛사람)이 무너지고, 새성전(새사람: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전의 포도원(옛성전:옛사람)이 아니라 다른 포도원(새성전:세사람)을 넘겨주는 것이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영적 자아)에게 주는 것은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건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육신이 죽고, 영의 몸을 입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는 성새전(지성소)이 세워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육체 속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일이 된다.

요한복음 16 7-8절에서 보혜사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악한 농부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육적 자아가 성전을 장사하는 것으로 만든 것이 죄이고,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 자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의가 되며, 그래서 육적 자아(악한 농부)가 심판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어야 할 옛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킬 때(진멸당할 때), 새사람으로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게 새로운 포도원이 된다.

 

3.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1)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3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구분을 해야한다. 히브리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 왕국이라 번역했는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개역개정은 천국이라고 번역했다. 천국은 한자어로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 왕국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는데,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하늘 왕국이 가까이 온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가까이 온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이키는 자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관사없는 단수 우라논은 눈으로 보는 하늘이다. 관사가 없는 복수 하늘은 세상의 교회를 의미한다. 관사가 있는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고, 관사가 있는 복수하늘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이 그들의 옷을 벗고, 영이 훍에 갇히므로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 갇힌 존재이다. 그래서 두번을 죽는 것이다. 창세기 2 17절에서『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히브리어 성경은 죽고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다. 두번 죽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3 3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거듭난다고 표현했는데, 이전의 것은 죽고(두번)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다. 두번 죽음에 대해서, 첫쩨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물세례), 두번째 죽음은 혼에 대한 죽음(불세례)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고, 혼이라는 더러운 옷을 벗는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 즉 모든 인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셔서 너희들은 죽어야 할 존재하는 것을 알려주셨다. 베드로전서 3 19-20절에서『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6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혼의 죽음은 불세례로서 육체로 비롯된 혼(첫사람 아담)의 죽음이다. 육의 몸에서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마태복음 3 11-12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삼일이라는 숫자가 있다. 삼일은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2 19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예수와 함께 죽은 성도는 그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은 육의 몸에서 영의 몸(새로운 혼)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44-47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물세례), 육적 몸()이 죽었다고 믿는 자(십자가 후 삼일)는 하늘로부터 오는 옷을 입게 된다. 이것이 부활인 것이다. 부활은 이전의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제사장이 되고, 제사장의 거룩한 옷을 입는 것이다.

승천은 성도가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전은 곧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 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천국이 바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시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 역시 하나님 나라의 보좌 우편에 있는 것이다.

재림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며, 헬라어로 파루시안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교회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자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만나서 천국 혼인 잔치를 하는 것이다.

(2) 셋째하늘의 개념

고린도후서 12 2-4절에서『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하늘(트리투 우라누)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파라데이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셋쩨하늘을 트리투 우라누라고 표현했다. 톤 우라논(τν ορανν)은 복수로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이고, 단수인 우라누는 개인의 심령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트리투 우라누는 셋째하늘로서 성도의 심령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셋째 하늘을 낙원(파라데이손 παραδεισον)이라고 표현했다.

누가복음 23 43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파라데이소 παραδεισω)에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명 중 하나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23 41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이는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23 42절에서『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τη βασιλεια)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당신의 나라에서는 왕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이때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행악한 자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육체가 죽어서 가는 나라로 생각한 것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낙원인 것이다.

낙원이라고 칭한 셋째하늘은 남자 아담과 여자 하와가 쫒겨나기 전의 에덴동산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사야 51 3절에서『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3) 회복된 회복된 에덴동산

회복된 에덴동산에서의 모습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사야 65 25절에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요한계시록 21 1-2절에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예루살렘 성을 요한은 계시록에서 다시 표현한다. 계시록 21 18-21절『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

새 예루살렘의 성곽과 성곽 기초석의 재료에 대해 말한다. 이 보석들을 이와 같이 나열하고 있는 이유는 보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 예루살렘이 이와 같이 귀한 보석으로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28 17-20절을 보면 대제사장의 가슴에 착용했던 흉패에도 열 두 보석이 있고, 그곳에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계획의 완성으로 각 지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석과 같이 아름답고 흠 없이 빛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다. 보석이라도 다 같은 색과 모양으로 빛나는 보석이 아니라 다양한 빛깔들과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보석들이다. 그러나 보석은 찾기 힘든 귀하고 보배로운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보석 중에서도 진주는 고난의 상징이다. 고난을 이겨낸 자들이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셋째하늘은 낙원이며, 회복된 에덴동산이며, 새하늘과 새땅이며, 천년왕국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는 셋째하늘이 심령 속에 들어오는 성소가 된다.

4. 교회 속의 하나님 나라

오늘날 신도들이 어떤 장소에 모여 예배를 볼 때, 그 장소를 교회라고 말을 한다. 신학에서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성전의 개념을 잘못 인용한데서 비롯된다. 이미 돌성전은 다 무너지고 없으며, 오직 성전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이며, 성전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 교회 건물은 신도들이 모이는 것을 제공하는 장소에 불과하다. 교회 건물이 거룩한 곳이 아니라, 모인 참 성도가 거룩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참 성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모르는 신도들이 섞여 있다. 따라서 모두를 성도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 찬송과 예배를 드리고, 전도의 사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성경에서는 두 세사람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그 의미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8 20절에서“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 20절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모임에서 혹은 교제하는 중에 자주 언급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이 말씀을 공동체의 규모가 작거나 소수의 구성원일지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라면 주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 모임과 공동체를 축복할 때 사용하곤 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정말 그 맥락에서 주신 것일까? 이 말씀이 등장하는 마태복음 18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의미와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매우 특별한 상황 즉,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범죄와 용서에 대한 훈육 상황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이다( 18:15~20). 예수님이 죄를 짓고 서로 갈등 중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가르쳐주셨는데, 죄로 인하여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취해야 할 실제적인 단계를 열거하셨다. 

첫째, 만일 어떤 형제가 죄를 범했다면 그 당사자하고만 권면해서 화해를 도모하라는 것이다.“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8: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들의 용서와 화해의 첫째 방법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권고에 있다. 이렇게 하면 당사자의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개인적인 권면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용서와 화해의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두세 명의 증인을 개입시켜서 해결하라는 것이다.“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8:16).이것은 범죄한 형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신중하게 이 문제를 다루라는 의미로 주어졌다. 

셋째,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의 기회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교회의 권위로써 해결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럼에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그를 불신자와 같이 여기라고 선언하셨다.“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17).

예수님은 죄 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교회에 맡기셨다. 곧 ‘매고 푸는’ 신적 권위가 교회에 주어졌음을 분명히 밝히면서 확신을 주신 것이다( 18:18).  범죄한 사람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문제, 나아가 교회의 합법적인 권징에 대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예수님은 범죄한 사람에 대하여 교회가 어떠한 결정을 이루고자 할 때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19) 반드시 두 사람 이상(증인)의 일치된 기도가 필요하고, 하나님은 여기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두세 사람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죄의 문제, 화해 혹은 징계의 문제라는 어려운 일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구하는 교회가 바로‘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진정한 맥락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함께 있을 거라는 약속이다.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자리와 때로는 안타까울지라도 징계를 선언하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함께 하실 거라는 약속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징벌이 아닌 화해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 단락 전후에 일관성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한 마리의 양도 잃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뜻을 보여준 ‘잃어버린 양의 비유’( 18:12~14) 바로 뒤에 이어지고,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해 징계를 받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 비유’( 18:21~35) 바로 앞에 있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누군가 죄를 지었거나 혹은 그릇된 길로 가버린 사람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마태복음 18 20절 말씀을 일반적인 예배 모임이나 기도 모임, 친교의 자리에서 사용한다면 그것을 굳이 틀린 적용이라고 지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모임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라면 근본적으로 사람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할 것이며, 서로에게 피차 죄를 용납하고 화해하려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구절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공동체 사이에 놓여 있는 죄와 범죄에 대해 더욱 간절한 청산을 소망하며, 서로를 용서하고 더욱 성숙한 화해를 이루려는 소망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5.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다.

마태복음 6 10절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은『세상에서 무엇을 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땅에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해야 될 것은『창세 때 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있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이룬 뜻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요한복음 6 40절에『아들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라 했다. 에베소서 1 4-5절에는『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하나님의 뜻은『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이루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뜻이『창세 전에 이미 세워졌다』라는 말이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2 1절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와이쿨루(이루니라) 하사마임(하늘) 워하아렛츠(땅과) 워칼() 차밤()](וַיְכֻלּ֛וּ הַשָּׁמַ֥יִם וְהָאָ֖רֶץ וְכָל־צְבָאָֽם)이 개역개정의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과 차이가 있다. 차밤(기본형은 차바)은 군대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지니라 라고 번역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각종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드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 하늘의 군대와 땅에 있는 군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과 이 땅에서의 군대(범죄한 영)가 다 배치가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탕자의 비유가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을 떠난 영들을 기다리고 있다. 탕자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고통 속에서 아버지 집을 기억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 어둠 속에 있는 영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둠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 하늘과 땅,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지니라 라는 말은 하늘의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다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에덴동산을 의미한다. 즉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말씀이다. 일곱째 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날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안식이 된다는 말이다. 육일 창조를 생각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챠바』라고 하는 이 군대는 하나님나라의 군대이면서 이 땅에서의 군대이기도 하다. 히브리어 챠바라는 군대는 헬라어(스트라티온), 라틴어 (레게온)으로 번역된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 69 6절에서『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그리고 시편 80 4절에서『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등의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군대라고 표현한다.

누가복음 2 13절에서도『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마태복음 26 53절에서『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라틴어 레게온으로 번역)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여기는 하늘의 군대라고 표현한다. 하늘의 군대는 천사들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는 말은『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다 이루다』라는 말은『완성하다, 마치다』 라는 것이다. 창세기 2 2절에서『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하나님께서 지으시던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물질세계에 하나님의 군대를 재편성 완료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2 3절에서『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조하시며, 만드시던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을 재편성하시는 것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한 천사들은 그 옷을 벗기고, 흙속에 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셨는데, 이 사람이 땅의 군대가 되는 것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host of them. 라는 말은 하늘의 군대는 범죄한 천사들을 제외한 천사들로, 이 물질세계의 군대는 범죄한 천사들로 창조가 끝났다는 것이다.and all the host of them.』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군대와 물질세계의 군대를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만물은 이 땅에 있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도 적용된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만물은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물질세계에 창조된 인간들에 대해서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유다서 1 6절과 베드로후서 2 4절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한 천사들을 말한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 6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레위기 25 23절에서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안식은 하나님이 물질세계에 있는 영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약속의 씨를 두신 것이다. 씨를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 나라로 복귀할 때, 그 또한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버지가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하고 그것을 받아서 세상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다가 회개하여 죽은 자같이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이다. 탕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난 자기 지위를 지키지 못한 영들을 말한다. 그러나 회개하여 죽은 자 같이 되어 돌아가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장사지낸바 되었을 때, 영의 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의 군대는 안식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세계의 군대는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 안식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 안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그 안식일을 통해서 백성들이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 자체에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므로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장래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으면 그것이 안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안식을 주겠다고 표현이시다. 첫째를 포함해서 여섯째 날은 세상에 대한 날이다. 사람의 일이 끝나는 날이 여섯째 날이 된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안식하는 것이다.

창세기 1 29절에서『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먹거리를 만들려면, 경작해야만 한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게 된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유다. 창세기 2 15절에서도『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내어쫒으시고 창세기 3 23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그래서 경작을 통해서 영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라는 것이다. 땅을 갈아서 열매를 얻어서 먹지만 영원하지 못함을 깨닫고, 영생하는 열매를 찾으라는 것이다. 인간들이 온 힘을 하여 노력하지만,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땅에 온 군대가 마음의 땅을 갈고 하늘의 씨를 뿌려서 영생의 열매를 얻으라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면, 일곱째 날에 안식을 얻게된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이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사람은 영생을 구하는 일을 하게되고, 하나님은 영생을 주는 일을 하게된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이 바로 약속의 씨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기 1 1절에서부터 세상의 빛을 통해서 참빛이 세상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6 27-29절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시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사는 동안(육일동안) 세상의 일을 하다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 과일을 찾아야만 하고,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 흑암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어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하는 것이다. 인생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 밭을 갈아서 영생하는 열매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식)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육일동안 일을 하다가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약속의 날이 육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한 개인은 육체적 죽음으로 그 기한이 종료되지만, 인생들 전체적으로 볼 때 육일이 끝나는 기간이다. 육일이 끝나는 날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갈라디아서 4 4절에서『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기한이 종료되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이 끝난 것이다. 육일 동안 세상 사람의 일과 일곱째 날에 하나님의 일이 다 종료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하늘과 땅의 군대를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이 오는 것이다.

 

Ⅱ 천사들

1. 범죄한 천사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유다서 1장과 베드로후서 2 4절에서 말하고 있다. 유다서 1 6절에서『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베드로후서 2 4절에서『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흑암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이 흑암이 바로 이 세상이다.

이 범죄한 천사들을 가둔 곳이 지옥이라고 불리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며,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사람은 천사의 영이 흙에 갇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6 1-13절에서『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을 의미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얻는다. 그런데, 사람의 딸은 누구인가? 바로 흙(아다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이 흙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표현이다. 범죄한 영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의 물질세계에 있으므로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쫒겨나서 물질세계에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갇혀진 것이요 최종 심판은 유보되어 있지만 그것은 심판을 받은 것이요, 쫒겨나서 육체 안에 모든 것이 갇혀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은『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해보라고 하나님 나라에서 쫒겨난 것이 천지창조요, 세상에 쫒겨난 상태로 흙이라는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왔으니까 어두운 가운데 탄생한 것이요, 죄악 가운데 탄생한 것이요,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창조가 된 것이 천지창조의 요약이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로 범죄한 자들이 쫒겨나서 어두움 가운데서 죄악된 상태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어진 인생들에게 하시는 말씀은『나 없이 의를 이루어 보라』는 것이다. 해 본 결과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있는 것들, 사람, 짐승, 새 등 모든 것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심판을 받게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즉 하나님없이 살아본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없이 살아본 결과 멸망에 이르게 된 결과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여러가지의 경우로 해석을 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사람 셋의 후손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고 하기도 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은 타락한 천사이고 사람의 딸은 이 세상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믿음의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모두가 그럴듯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범죄한 천사의 영, 사람의 딸은 영을 집어넣은 흙이다. 

이 부분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노아의 홍수가 왜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게된다. 사람들 중에는 범죄한 천사가 여자의 미모를 보고 육신이 되어서 같이 결혼을 하고 후손을 낳아서 그 후손이 네피림이라는 고대 용사가 되었다 라고 한다. 타락한 천사와 미모의 여자가 결혼을 해서 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상한 괴물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22 23-3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사들은 사람처럼 시집도 안가고 장가도 안가는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천사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딸을 어떤 사람으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이다. 흙을 사람의 딸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영과 흙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사람은 죽어야 할 운명의 혼이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혼이 된 존재다. 그래서 혼 속에 빛을 발하여야 할 영은 어둠에 있으며,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죄가 그 속에 굳건한 성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 굳건한 성을 옛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창세기 1-3장의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인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이 사탄을 따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하나님이 천사의 옷을 벗겨 그 영을 흙속에 가두므로 혼이 된 것이다. 그래서 물질세계가 만들어지고 사람이 창조되었다. 창세기 2 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생령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네페쉬ֶ֥נֶ֥פֶשׁ  하야 חַיָּֽה)이다. 살아있는 혼이라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왔으므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원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이것을 물세례로 표현되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바로 물세례를 표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물세례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 5절에서 예수와 함께 죄의 몸이 죽은 것으로 표현된다. 두번째는 불세례이다. 이는 혼에 대한 죽음이다. 불세례는 육체로 부터 받은 혼(옛사람)을 벗는 의식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로 하늘로 부터 새로운 혼(새사람: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 

이 옛사람은 첫사람 아담을 의미한다. 첫사람 아담은 그리스도로 하와(범죄한 천사를 상징)가 주는 선악과를 먹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죄를 뒤집어 쓰고 세상에 태어나 사람들에게 죄의 몸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 아담(옛사람)은 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 아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범죄한 천사들이 첫사람 아담과 함께 세상에 와서, 마지막 사람 아담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 45-46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첫사람 아담으로서 사람들에게 죄의 몸을 주고, 마지막 사람 아담으로서 의의 몸을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마지막 사람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 율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죄목은 신성모독죄로 죽은 것이다. 유대지도자들이 죄목을 신성모독죄로 붙혔지만,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 아담속에 있는 죄(하나님처럼 되고 싶은)가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결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을하고 죽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를 그도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를 물세례, 불세례로 표현했다.

로마서 6 3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그리고 로마서 6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는 자는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한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을 표현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드려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물세례는 죄를 씻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죄의 씻음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물은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부활시키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해결된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물세례를 상징한다.

그래서 두번째로 부모로부터 받은 혼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혼으로 갈아 입어야만 한다.이것이 불세례이다. 새로운 혼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먼저 혼이 불에 타 죽고 성령으로 다시 새혼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3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누가복음 12 49-50절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은 불세례를 상징한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혼은 죽고, 성령세례로 하늘로부터 오는 혼(영의 몸)을 받는 것이다. 이를 부활이라고 말한다. 이 성령세례를 오순절에 제자들이 받은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된다. 불세례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고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참고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불세례 뿐 아니라 물세례도 포함된다. 즉 죄(육적자아)와 옛혼(옛사람)의 죽음이다. 

 

2. 에덴동산 이야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바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창세기 1-3장의 내용은 창세 전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주된 내용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었다. 계명을 어긴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생긴 것이 죄의 근본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계명을 어긴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은 하와를 상징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어두운 구덩이(지옥)에 가두었는데, 천사의 영을 흙과 결합시며 만들어진 것이 사람이다. 첫사람은 모든 인간들에게 죄의 몸을 물려주기 위해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 그 첫사람은 죄의 몸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첫사람이 분리되어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는데, 남자를 아담, 여자를 하와라 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첫사람도 아담, 남자도 아담으로 되어있으므로 혼란스럽다. 첫사람의 아담은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담이다. 두번째 남자라는 아담은 이름의 아담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쫒겨나오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창세기 2 8-9절『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방(히브리어:케뎀)이라는 의미는『동쪽』이라는 뜻과『태초』라는 뜻이 있다. 케뎀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들이 있다. 시편 55 10절에서『예부터(케뎀)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 (셀라)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 외에도 시편 68 33, 시편 78 2, 잠언 8 22-23절에서『태초, 옛적』이라는 말이 동방이라는 히브리어(케뎀)과 같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동방은『태초』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 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덴』 역시 태고라는 의미를 갖는다.

 

동산에서 산은 하나님의 성전(성소)을 의미한다. 성전(성소)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5 40절에서『너는 삼가 이 상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지을지니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하늘의 식양대로 짓게 했다. 하늘의 식양은 무엇인가? 하늘의 식양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히브리서 9 24절에서『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성전에 들어가면 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놋 제단에서 짐승을 죽여야만 한다. 죽인 다음에는 반드시 물두멍에서 물로 씻는다. 성전 마당에서는 두 가지가 역사해야만 한다. 제물이 죽어야 하고 죽음을 기초로 해서 씻어야 하는 것이다. 성소에 들어가면 감람유의 등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진설병의 떡이 있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간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다.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 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다.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에 부었다. 이 피가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죄를 덮허주었다는 것이다. 지성소에서는 법궤가 있는데, 바깥에서는 만나가 시간이 지나면 썩지만, 법궤 안의 맛나는 썩지 않는다. 그 옆에 싹난 아론의 지팡이도 있다. 지성소 안에는 생명이 역사한다.

동방의 에덴에 있는 동산(에덴동산)과 하늘의 식양대로 만든 성전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두었다고 말했다. 사람은 아담이다. 아담은 세상에서 태어난 첫사람이다. 첫사람 아담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로마서 5 14절에서『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모형이라는 말은 형태와 속성이 같은 의미를 갖는다. 죄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인으로 이 세상에 오고, 마지막 아담은 죄인과 같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죄의 몸으로 태어나서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알려주신다.

첫사람 아담은 세상 사람들에게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은 죄의 몸에 대해서 죽고, 영의 몸(의의 몸)으로 살게 하기 위해 태어나신 그리스도인 것이다.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몸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각각 영적인 원죄(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죄)를 가지고 육체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여기서, 아담의 범죄는 대속 제물이 되는 죄인인 것이다. 백성들의 죄를 대신할 동물을 죽여서 그 피를 대제사장에게 전가하여 죄인의 대표로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와는 하나님께 죄를 짓고, 영이 하나님을 떠나, 육체와 결합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가 아닌 것이다.

죄인과 희생 제물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죄인을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죽고, 대제사장이 그 피를 속죄소에 부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드리시면 죄인이 죽은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죄인과 희생제물이 하나가 된다. 곧 희생제물의 죽음과 죄인의 죽음이 하나가 되어 그 죄인도 죽고, 다시 새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으로부터 하와가 분리되었으며,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그리고 그 열매를 남편인 아담에게 준 것이다. 아담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을 위해, 하나님 자신이 첫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죄의 몸을 주고, 마지막 아담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죄의 몸으로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범죄한 영들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으로는 육(하나님이 스스로 육체가 됨)과 영(범죄한 영)이 결합되어 인간이 되게 하셨고, 마지막 아담으로는 부활한 영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거듭난 몸을 입게하시고, 영이 성령과 결합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바로 대제사장과 죄인들인 백성들과의 관계로 설명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있으며, 생명나무도 있었다. 히브리서 9 4절에서 말하고 있다.『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언약의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의미한다.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법을 의미하는 돌판들은 바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상징한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악은 사탄의 유혹을 따르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탐욕의 마음이 있는지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죄는 바로 이 탐욕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와(범죄한 영들)는 깨닫지 못했다. 범죄한 영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는 죄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골로새서 3 5절에서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죄의 근원은 선악과를 따먹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탐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3 6절에서『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먼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 하나님께 대하여는 원죄가 되는 것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는 의미를 갖는다.

성소에 들어온 죄인들은 계명을 어긴 것이지만, 계명을 어기기 전에 이미 탐욕의 원죄가 있는 자들인 것이다. 원죄의 배경은 사탄으로 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3 4-5절에서『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뱀은 사탄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에 뱀이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사탄을 의미한다. 사탄은 원래 천사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계명성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헬렐(헬라어:루시퍼)이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물질세계에 던져버린 후 사탄(마귀)으로 이름이 불리워지게 되었다. 누가복음 4장에서는 마귀로 번역되었고, 마태복음 4장에서는 시험하는 자로 불리웠으며, 요한계시록 9장에서는 사탄으로 되어있다. 사탄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영적인 존재로 공중권세를 잡은 자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영들을 육체 속에 가두어 인간이 되게 했으며, 죄목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을 가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 자체가 죄인 것이다. 그 탐욕의 결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성소에 들어온 모든 죄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죄를 범했다. 그러나 죄인들은 동물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면 죄를 용서받는 정도로 그들은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희생동물과 함께 죽은 자, 곧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계속되는 죄와 희생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기억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율법의 계명만 잘 지키면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또 죄를 지으면 제사를 지내는 악순환을 계속한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은 대속의 희생제물과 하나가 되는 길이다. 성소에서 대속제물과 하나가 되는 것은 죄가 전가된 대제사장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세례의식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 24절에서『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성경은 말한다. 남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부모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아내는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난 영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큰 비밀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5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에 대해서 그 마음()에 인을 쳤다고 말한다. 인을 쳤다는 말은 곧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성도의 마음()이 성전이 되는 것은 대속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어 다시 태어난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가지면,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소는 하나님 나라의 식양대로 만들어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 뱀은 사탄, 아담은 그리스도, 하와는 사탄의 미혹을 받은 악한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덴동산이라는 성소(성전, 교회:성령으로 인을 치신 영)를 통해서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세상이 죄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신다. 에덴동산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성전이기도 한 것이다.

에덴동산을 이 세상의 어느 곳, 또는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영이 살아 움직이는 자가 아닌 것이다. 사탄이 그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영은 여전히 죄의 감옥인 흑암 속에서 죽어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의 몸(의의 옷)을 벗고, 이 세상에 온 영들이며, 그리스도로 인해서 다시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성도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하나님 나라라고 하지 않았는가?

히브리서 11 13-16절에서『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3. 사탄과 그의 사자들

(1) 사탄은 대적자 역할을 한다.

구약성경에서는 대부분 사탄이 사람(대적)으로 표현되었다. 사무엘상 29 4절에서『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히브리어:사탄)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사탄을 대적으로 표현했다. 대적은 블레셋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대적으로 표현한 곳은 사무엘상 5 18, 열왕기상 11 4, 시편 109 6절 등이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섬길 때마다, 하나님은 대적자를 시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돌이키고, 다시 우상을 섬기면 대적자를 통하여 그들을 치는 것을 반복한 것을 볼 수 있다. 

(2) 사탄은 세상의 왕으로서, 공중권세 잡은 자이다.

또한 영적으로 공중권세 잡은 자로 표현된다. 요한계시록 12 8-9절『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사탄은 하나님의 천사장이나, 천사들이 가지고 있던 죄의 마음을 이끌어 냈지만, 결국 그들을 죄인으로 몰고 간 것이다. 결국 악한 천사들은 세상이라는 감옥에 가게 되고, 사탄은 그들을 관리하는 자로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그것을 공중 권세 잡은 자로 표현된다. 

요한계시록 12 10절『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3) 사탄은 죄인을 참소(고소)한다.

욥기에서 참소자로 등장한다. 사탄은 욥을 통해서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자를 하나님께 참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 속에 있는 자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사탄(마귀)은 참소(카테고론 κατηγορν)하는 자이다. 

마귀는 율법 아레 있는 죄인들을 하나님께 참소한다. 사탄이 욥을 참소한다. 요한복음 5 45절에서『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모세가 사탄의 역할을 한다. 모세는 율법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계속 신도를 고소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그리스도가 전쟁을 이겼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더 이상 율법의 필요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참소당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과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이는 복음의 능력이다. 

(4) 사탄은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요한복음 8 44절『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에피뒤미아스)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아르케스 ρχς) 살인한 자요(안드로폭토노스 νθρωποκτόνος) 진리가(알레데이아 ληθεί) 그 속에 없으므로(엔 아우토 ν ατ) 진리에(엔 테 알레데이아 ν τ ληθεί) 서지 못하고 거짓을(프세우도스 ψεδος)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엑 톤 이디온 κ τν δίων)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프세우스테스 ψεύστης)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개역개정)에피뒤미아스는 욕망, 갈망 등의 의미다. 아르케는 우두머리, 첫번째라는 의미를 갖는다. 안드로폭토노스는 살인하는자, 살인자를 의미한다. 엘레데이아는 진리, 엔 아우토는 그의 안에서, 엔 테 알레데이아는 진리 안에서, 프세우도스는 거짓말, 엑 톤 이디온은 자기에게 관한, 자신으로부터, 사적인, 구별된 이라는 의미다. 프세우스테스는 거짓말쟁이이다.

그래서 다시 번역해보면,『너희의 아비는 마귀(디아블로)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가 갈망하는 것을 행하는구나. 그는 첫번째 살인자이며,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그가 말할 때마다 자기의 것으로 거짓말을 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라.』마귀는 곧 사탄이다. 사탄은 세상의 왕이요, 율법에 따라 행하는 감옥의 관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 사면과 같은 진리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율법에 따라 죄를 짓는 자를 고소할 뿐이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지만, 악한 천사들을 영적 죽음으로 내몰아간 첫번째의 살인자에 해당한다. 하나님 처럼 되고 싶은 악한 천사의 마음을 알았지만, 그들의 죄를 돌이켜야 할 자가 오히려 악한 천사들이 죄를 짓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리에 서 있지 못하고, 다른 피조물에게는 거짓말쟁이가 된 것이다. 마치 함정을 파서 상대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만들어 악한 천사들을 가두고, 사탄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을 놓고 빠뜨리려고 하는 모습과 유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진리에 서 있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사탄의 자식이라고 맹렬하게 말씀하셨다. 사탄은 죄인들이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에게 하나님이 사면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고, 함정을 파서 계속 율법 속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자인 것이다.

(5) 사탄은 성도에게 육체의 가시를 준다.

고린도후서 12 7-10절에서『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바울도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가끔은 비관적인 생각도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에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가시를 통해서 자극을 주신 것이다.  

(6) 사탄은 신도가 사람의 일을 할 때 다가간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신 자(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갑자기 반기를 든 것이다. 즉 죽으시면 안된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6 21-23절에서『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한 순간 하나님의 일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므로, 사탄(검사)이 베드로를 기소하려고 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보호하려고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꾸짖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므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베드로는 닭이 세번 울 때까지 예수를 세번 부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마태복음 26 75절에서『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찾아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임무를 맡기셨다.

베드로와 같은 경우가 사도행전 21 10-14절의 내용이다.『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성령을 통하여 바울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는 말을 들은 많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도록 권했다.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자기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서 사명을 다 하려 했는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한 제자들은 바울의 죽음을 걱정하여 말리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제자들은 또한 이를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7) 사탄(마귀)은 신도를 시험한다.

사탄의 시험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도에게도 나타난다. 시험의 목적은 예수님의 예를 통하여 볼 때, 잘못된 구원론을 믿고 있는 자를 가려내는 것, 복음과 율법을 겸히 받아드리는 자를 가려내는 것, 하나님과 세상을 겸히 섬기는 자를 가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자를 하나님께 고소하는 것이다. 

 첫째 잘못된 구원론은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야 구원에 이른다. 둘째 복음과 율법을 동시에 받아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의 피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지만, 현재와 미래에 대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율법의 규정을 지키거나 항상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과 세상을 겸히 섬기는 자는 영적 우상숭배에 해당되는 것이다. 성도는 성경 말씀으로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으므로 문제가 없을 것이나, 성령으로 나지 않은 신도들은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세상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자유함을 입을 수 없는 것이다.

(8)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다

마태복음 4 1-11절『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탄과 예수는 세상적으로 말을 하면, 검사와 변호사 역할이다. 하나님은 대통령으로 비유할 수 있다. 법에 따라, 대통령이 죄인들을 기소하는 역할을 검사제도를 만들어서 권능을 주었다. 온 세상은 죄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감옥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대통령이 감옥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사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사면의 권능을 변호사 역할을 하게 될 그의 아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검사는 당연히 자신의 역할에 도전하는 이 변호사가 탐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정말 권능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게도 하고 해서, 앞으로 수없이 많이 만날 것인데, 변호사가 검사에게 자신의 직책을 소개하고, 검사는 변호사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검사와 변호사가 대면하게 해 주는 역할을 대통령 비서실장이 맡았다. 변호사는 죄인들을 사면하기 위한 대책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성령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상징한다.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여 주리다 라는 말은 변호사가 회개하는 죄인들을 발굴해야 하는데, 많은 준비를 했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배가 고픈 것이다. 검사는 변호사에게 세가지의 질문을 하면서, 서로의 팽팽한 기 싸움은 진행되었다.

첫번째 질문은 당신이 죄를 사면할 권능을 가졌다고 하는데, 여기 죄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어디 이 자리에서 사면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는 아무 죄인이나 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사면한다는 말로 대답했다. 회개하는 마음은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깨닫고, 그 분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는 변호사의 말에 응수하지 못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이 돌들은 율법 아래 있는 죄인들을 의미한다. 떡덩이는 생명이 있는 떡으로서 죄를 벗고 의인이 된 자를 의미한다. 즉 죄인을 사면해서 의인으로 되도록 해 보라는 것이다. 이게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변호사인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자가 의인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하늘의 생명)을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말씀은 구약성경일 것이다. 모든 죄인은 동물을 죽여서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 희생제사를 통해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이다. 말씀 속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이다. 당신이 죄인들을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만일 당신이 죄를 범하면 당신 스스로 사면을 하게 할 것인가 묘한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변호사도 세상의 법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은근히 유도한 질문이다. 대통령은 변호사를 세상이라는 감옥에 파견할 때, 세상법에 적용받지 않도록 정해놓았다. 그런데, 변호사가 만일 검사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면, 법 집행이 가능해지며, 언제라도 검사가 변호사라도 법의 규정을 어기면, 기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는 검사의 유도 질문에 대해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을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검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자살행위이다.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다. 예수가 율법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도 철저히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유도 질문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말하고 있다. 사탄의 질문에 넘어간 자들이다.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 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서 수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종의 형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수동적 순종의 일부라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의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사상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과 예수님의 율법적 순종이 합해져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이단적인 발언들이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신 분이었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율법에 따라 죽으셨다.

세번째 질문이다. 대통령께서 죄인들을 기소할 수 있도록 모든 권한을 나에게 주었는데, 당신이 대통령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권한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신이 대통령이나 다를 바가 없으므로,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차라리 기소권을 당신에게 다 넘겨줄 테니 당신이 북치고 장구치고 하세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내가 비록 사면권을 부여받았지만, 대통령은 절차를 중요시하므로, 당신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풀어주어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니, 대통령이 지시한 대로 당신이 맡은 바를 열심히 잘 하시요 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검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그 자리를 떠고 말았다. 변호사도 대통령실 행정관의 안내를 받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 이야기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이 성경 귀절은 마태복음 4 8-10절의 말씀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4 5-8절을 보면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탄이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라고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죄인을 기소하는 기소권을 넘겨준 것을 의미한다.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에서 “절하다”라는 헬라어는 프로스쿠네세스(προσκυνήσς 기본형은 프로스쿠네오) 라는 단어이다. 아첨하다, 부복하다, 예를 표하다, 예배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는 절하다 라는 의미보다, 미안하다는 의미로 예를 표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히 섬기는가에 대한 시험이다. 이는 영적 간음에 해당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영적 전쟁을 말하면서 거의 대부분 사탄과의 전쟁이라고 말들을 한다. 죄인은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당연히 검사와 다투게 된다. 죄인이 검사를 바라볼 때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벗어나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사탄(검사)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의 적은 다름 아닌 육적 자아인 것이다. 영적 자아가 육적 자아와 싸워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우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에 해당된다. 만일 육적 자아도 좋고 영적 자아도 좋다고 생각하면, 하나님도 좋고 우상도 좋은 영적 간음을 하는 모양이다. 비진리에 속지 말고 진리에 서야만 살 수 있다.

 

4. 수호 천사들

교회 사람들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귀신, 어두운 영)은 악을 행하고, 수호 천사는 선을 행하는 그런 모습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천사가 함께 한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천사가 함께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어 있으므로, 그 천사는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그 천사의 모습을 악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천사는 사탄, 마귀, 귀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면, 그 천사는 복음을 전하고 죄에 빠지지 않게 돕는 수호 천사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성도가 부리는 천사가 되는 것이다. 사탄이 따로 있고, 천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천사도 역할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 율법 속에 던져진 인간들

 

1.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기 전에 먼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로 내셨다. 하나님께서 12 1절에 아브람에게 이르시기를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다시 4절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하란을 떠날 때 75세라고 하였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난 곳은 갈대아 우르인가 하란인가? 사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난 곳은 갈대아 우르였다. 4절에 “따라갔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란은 거쳐 지나간 곳이다. 갈대아 우르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갈대아는 바빌로니아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바벨론이다.

당시 우르-나무 장군은 우르 제3왕조를 창건하고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난나(월신)를 숭배했으며, 난나 지구라드 신전을 세우고 신성한 지역으로 구별했다. 신전은 발굴결과 길이 60m, 16m, 높이 26m의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그 당시는 천문학이 발달했다. 상행위를 위한 저울과 측정용기, 수학도 발달했다. 1년을 12개월로 정했으며, 1개월은 29 또는 30일로 정하고, 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매 3년마다 1개월을 첨가하여, 비교적 정확한 달력을 만들었다. 우르 제3왕조가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으나, 우르왕조 마지막 이비신왕때, B.C. 2,000년경 후반에 엘람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고,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서 아모리 족속들이 엘람을 축출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서 15세기 넘게 문명을 지탱해 온 수메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는데, 수메르가 멸망을 당하자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고, 권력을 휘두르던 지배층이 붕괴되어 민중들은 생업을 찾아서 안전한 곳을 찾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갔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와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게 되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75세에 하란을 떠나 세겜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나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1:9-10)

아브라함은 유목민들이 살았던 텐트같은 곳에서 살았다. 거대한 대상이었던 아브라함이 3대와 같이 장막에 거주한 것은 동일한 약속을 기다리는 인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최초로 사라가 죽어 묻을 막밸라 굴을 헷 족속으로부터 구입하게 된다. 이것은 이 땅이 약속의 땅으로서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24 7절에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종을 보낼 때도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하면서 언약의 말씀을 확인시켜준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삼대를 통해서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며,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하시고, 그의 열두 아들을 열두 지파로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천하만민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야곱)을 택하신 이유는 구원과 관계가 된다. 야곱은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훔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도망쳐 외삼촌인 라반의 집으로 가게 된다. 가는 도중에 벧엘이라는 곳에서 잠을 자다가 하늘에서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가 사닥다리(그리스도:첫사람 아담)와 함께 세상으로 왔다가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모습을 꿈으로 계시된 것이다. 라반은 사탄을 상징하고, 라반의 집은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세상에서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반의 딸과 하녀를 통해서 열두 아들을 얻게 된다. 디나라는 딸도 있었지만,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얍복강에 이르렀다. 야곱은 형 에서가 두려워서 강을 건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밤에 한 천사가 나타나 씨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천사는 야곱의 둔부를 쳐서 골절이 되어 절름발이가 되었다. 도망갈 수 없는 자가 된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다. “이스라(싸워 이기다)”와 “엘(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뜻의 의미를 갖는 이스라엘이며, 민족의 시작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모든 백성이 장차 세상에서 건져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신다. 야곱은 그리스도의 씨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 그림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바로에 지배를 당하고,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로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등장시키고, 열가지 재앙과 장자의 죽음(어린양의 피)을 통해서 모세가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그림이 바로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꾼 그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약속하신 구원의 표시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예수님이 제자를 택하실 때 나다니엘(바돌로매)을 택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요한복음 1 51절에서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언약의 성취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을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약속의 성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게 바로 율법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말인 것이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심

 

교회사람들은 누구나 다 율법을 안다 라고 생각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율법은『죄를 깨닫게 해주고, 심판 아래에 있게 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잘 아는 것 같이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율법에 대한 생각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폐했다』 라는 사도바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는 그 말의 뜻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두 말이 아주 상충되는 것 처럼 보인다. 율법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부터 나와서 시내산에 모여있을 때에 하나님으로 부터 율법을 받게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죄 아래에 있고,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심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죄사함을 받는 일이 다 이루어지면 너희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단순히 어떤 계명을 지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인이라서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넣어서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보여주셨고, 그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는 것을 율법에 담아두었다 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를 모르면 사실상 율법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주실 때에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 율법대로 이렇게 살아라』하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너희가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통해서 어떻게 행하라고 하셨는가를 요약해서 말하면,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께서 담아둔 구원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너희 속에 죄가 있으나 죄를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죄를 행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라 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인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인 가나안 땅에서 율법을 가지고 열심히 의를 이루는 일을 행해보라 라는 것이다. 그게 이스라엘이고 가나안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인 가나안 땅에서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의지대로 열심히 해보라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율법을 해보도록 하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시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율법을 해보므로서 나타나는 결과는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그 결과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 처럼 저희들도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을 인정하라 라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는 사망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대명사인 모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의인으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실패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으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실패하는 인생들이 이스라엘의 결과인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영들이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와서 하나님의 법을 스스로 지키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죄 속으로 빠져 들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 마다 짐승을 죽이면서 까지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발버둥치고 해도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를 깨달아 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의 근본 목적은『나는 할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달아라 라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손을 들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나오지 않으면 멸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당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법을 가지고 자기들의 힘으로 의를 이루어 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그 결과는 실패가 되었다. 결과는 실패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샘플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의를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 라고 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

 

『죄는 불법이다』라고 한다.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죄를 짓는 것을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또 레위기에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깨닫게 되어 죄가 생각이 나면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가져와서 속죄 제사를 드리라』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성경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실 때에『율법을 어긴 것이 죄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죄는 법을 어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데에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죄는 사실상 율법을 어긴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법을 어기면 그게 죄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간이 분명히 알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회개를 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행한 행위에서 죄를 찾는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지 찾지 않고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사람의 기준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이다. 이 세상 물질세계에서 인간이 짓는 여러가지 잘못을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가두어 두셨다는 표현이 있다. 천사들이 범죄를 했는데, 범죄가 하나님 나라에서 창세 전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에서, 왜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야만 되었는지? 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야만 했는가?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일이 창세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흙에 갇혀 있는 사람이 바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죄인이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흙이라는 옷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영의 몸을 입어야만 죄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에베소서 1 4-5절에서 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사 그 앞에서 흠이 없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했다. 당연히 거룩하지 못하고 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했으니까 거룩하지 못하고 흠이 있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을 떠난 거룩하지 못한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는 말이다. 범죄한 자들을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러 주신다는 말이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즉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심을 입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 4절에서『범죄한 천사들』이라고 표현하는데, 범죄한 천사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유다서 1 6절에서는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천사들의 지위는 천사로서 있는 것 자체가 지위이다.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처소를 떠났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처소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집을 말한다. 인간들 속에 다 영이 있는데, 이런 표현을 사도바울은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 집으로 표현하는데, 그 영이 육체로 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하나님의 처소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나님의 집이 바로 하나님의 처소』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 6절에서 말하는 처소와 유다서 1 6절에서 말하는 처소는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장막 집을 덧입는 것과 천사들이 자기 처소를 떠난 그 장막과 처소는 같은 것이다. 영을 위한 하나님의 집이다.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늘로 부터 오는 하나님의 처소를 덧입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에 부활에 관해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사두개인들은 내세도 믿지않고 부활도 믿지않는 사람들인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형수재취의 관례를 근거로 자식이 없는 한 여자를 두고 그 여자와 모두 결혼한 일곱 명의 형제가 죽었을 때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라고 질문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하나님도 잘 모르고 성경도 오해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부활 때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처소를 덧입는 것이다. 처소는 하나님의 집이다.

4. 율법 속의 그리스도

 

『율법이 연약한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육신으로 나타나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리 해도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이다.『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보통 교회사람들은『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이유로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떠났다』라는 말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율법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셨다』는 말을 통해서, 믿는 인간이 율법을 완전케 해 보려고 애쓴다면 곤란하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하려 하신 것이지, 그것을 보고 『인간들로 하여금 의지로 율법을 완성해 보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케 하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그 것이다. 예수님이『인간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이룬다』라는 말씀이다.『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예수님을 흉내를 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기 속에 있는 죄가 있는 줄을 모르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깨달았다.『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어떤 탐심이 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가 아닌줄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보시고『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같은 마음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들의 마음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제자들이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라는 질문에『음식을 먹고 뒤로 나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하셨다.

갈라디아서 5 3절에서 사도바울은『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라고 했다. 만일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고 믿거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다 하더라도 좋은 의미로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점검하고 또 그것을 지켜서 행한다』고 마음으로 결심한다면, 그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것은『할례를 받고자 하는 자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고, 율법의 계약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사람들 중『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율법을 잘 못지킬 경우 회개하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라고 생각하고 다 못지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즉 하나님과 율법의 계약관계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못지킬 경우 회개하면『예수님이 다 해결하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잘못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는 율법을 근거로 심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 10절에서『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라고 말했다. 이 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심판받는 기준을 다 자기 생각대로 정한다. 자기가 행한 죄를 생각하고 선을 행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선과 악을 행한 것으로 심판의 기준을 삼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하신 것을 믿는 것이 선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을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전적으로 믿지않고, 그럼에도『자신이 율법을 조금이라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이 다 악하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율법의 내용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살펴 보아야 한다.

로마서 3 31절에서『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에서 율법을 굳게 세우고 완전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음으로 율법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인간은 스스로 율법을 행해보려고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죄를 짓지않으려고, 율법에 비추어서 노력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 까지』(마태복음 11 13) 라고 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 4-5절에서『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라고 하고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라고도 했다.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의 약속을 발견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세례요한까지 예언한 선지자의 말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을 행해서 의를 이루어보라는 말씀이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럴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기회를 주었는데, 인간은 율법을 스스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이 판명났다』는 말이며,『인간들이여 그것을 좀 깨달아라』라는 말이다.『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은 결국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라는 말이다. 이제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율법으로 부터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교회사람들 중에는『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지,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델로 택하였지만, 모두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라는 말씀이다.

로마서 3 31절에서『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에서『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말씀』은『율법을 더 잘 지키라』는 말씀으로 느껴지지만, 사실상 믿는 자가 행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못하는 자가 율법을 보고 깨닫고 예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주체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님 속에서 들어가면 율법을 세우게되는 뜻이다. 예수님과 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면, 예수 속에 있는 나에게는 율법이 완성되어 율법에서 벗어나지만, 믿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율법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라는『이정표와 같은 것』이다. 이미 이정표를 보고, 목적지에 도달한 자는 이정표는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못한 자에게는 반드시 몽학선생이 필요하지만, 이미 온 자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율법이 이정표처럼 굳게 세워져 있어야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정표를 보고 목적지에 들어왔는데,『다시 마음을 돌이켜서, 이정표를 보고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리라』라고 말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5. 율법과 성령의 법

 

로마서 8 1-6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7 4절에서 보면『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서 죽은 이유는『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열매를 맺히는 일에 대해서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 잘 믿고,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 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열매맺는 일은 이웃의 죽어있는 영을 살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의 몸(옛사람)이 죽고,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예수를 믿는다』라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바라는 것은 회개하여 죽은 자같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 14-15절에서『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이 예수와 함께 죽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 21절에서『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창세기 12 1-3절에서『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이다. 복은 구원을 말한다. 창세기 22 18절에서『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또한 디모데전서 2 4절에서도『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회개하는 자의 심중을 보시고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었으므로 예수와 함께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그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새생명으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하늘의 생명을 전할 수 없다. 하늘의 생명을 전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는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전도하는 자가 이 땅에서 전도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세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묻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데는 사람이(예수님의 제자)가 필요하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 18절서『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로 부터 종의 형체를 입고 세상으로 들어가셨다. 제자들도 종의 형체로 세상으로 갔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를 증거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증거해주신다. 성령님이 오시는 이유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오시고 증거해주신다. 제자들은 육신으로 성령님은 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제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성령님은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10 15-18절에서『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런데 제자들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있으므로 연약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로마서 7 21-24절에서『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나님은 전도를 위해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인치시고, 하늘에 영의 몸으로 거듭나게 해주셨는데, 이 땅에서는 현존하는 육체로 인해서 여전히 곤고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날마다 죄를 회개하여 예수의 피로 씻을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육신으로 인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즉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게 하나님이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시키는 것이다. 날마다 죄를 회개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로마서 6 7절에서 분명하게 약속하신다.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그래서『마음놓고 죄를 지어라』가 아니라,『마음놓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도의 일을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로 문제가 생기면 다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해결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적용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한 자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고, 새생명으로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했다.

마태복음 7 22-23절에서『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6. 율법주의를 통한 폭력

 

마태복음 11 12절『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말을 한다. 천국이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서 The kingdom of God이라고 표현되었다. 헬라어로는 『헤 바실레이아 톤 오우라논』으로 읽힌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보좌의 하나님이 계시는 영적인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수님이 마태복음 6 10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에서 지금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세례요한의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라는 말로서, 하나님 나라는 침노 당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합되어 그들의 몸이 낚아 채이고, 부활과 연합되어 영이 천국으로 침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3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하나님 나라)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했다. 여기에서도 천국은 The kingdom of God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곧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헬라어 원문에는 폭력으로 하나님나라를 빼앗아간다고 되어있다.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자에게 천국은 침노당하지만, 천국을 강제로 폭력적으로 빼앗으려는 자가 있는 것이다.

누가 빼앗는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짜 복음을 내세워, 신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들을 한다. 가짜 복음이란 율법주의, 인본주의, 영지주의를 의미한다. 대부분 교회 안에 이런 가짜 복음이 너무나 만연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마태복음 11 12절의 말씀을 성도는 구원을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구원은 각자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몸부림 친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침노할 수 있는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침노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에다가 무엇인가를 더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폭력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다시 회복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역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도 안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다.

성도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속량은 피값을 주고 산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탄으로부터 죄인들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에 묶여 있는 모든 자들에게 십자가를 심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 속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사탄에 의해서 침노를 당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십자가를 그들에게 심어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영적 전쟁과 같은 것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아낙자손들과 싸운 것 처럼, 우리들에게도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심는 것이 그들을 영적으로 살리는 길이다.

 

. 하나님의 구원계획

1. 창세 전의 예정

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택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므로, 천지창조 후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죄에 빠져, 악해져서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하실 수 밖에 없는 상태가 오게되니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시고, 택한 자들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창세 전에 예정하셨다고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신 것을 잘 깨닫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6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어있는 영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다. 세상 사람들은 기준이 육체인데, 예수님은『육체는 무익하다』고 했다. 그 전제는 영이 다 죽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이 죽어있으므로, 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관심은 육체로 비롯된『나』라는 존재이다. 그래서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잘 먹고 잘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육체 속의 영이 언제 죽었는가? 대부분 교회는 에덴동산에서『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먹는 순간 죽었다』고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과 먹은 후의 영의 상태를 비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를 먹은 후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미리 그리스도를 준비하셔야만 했는가? 그것은 그냥 대부분 교회에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도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다서 1 6절과 베드로후서 2 4절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아서 영들이 땅에 갇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서 땅에 갇혀있는 범죄한 영들을 구하시려고 계획하셨으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마치 탕자의 비유와 같은 개념인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지만, 결국 회개하여 거지가 되어 돌아온다. 하나님을 떠난 영이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회개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된다.

범죄한 영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물질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범죄한 천사를 가두기 위한 것이고, 그 범죄한 천사의 영이 흙에 갇혀 사람이 되었으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계획하시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재림, 천년왕국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온 영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창세 전에 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 4절『곧 창세 전에(프로 카타블레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프로오리사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한다는 말은 물질에 앞서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신다. 프로 카타볼레스(πρ καταβολς)는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는 말이 카타볼레스 앞에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예정(그리스도 안)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다. 대부분 많은 교회 사람들이 창세 전부터 어떤 특정한 성도를 택했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택한다는 의미다.

그 기쁘신 뜻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한 기쁨』 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이다. 프로오리사스(προορσας)는 먼저 표시를 한다는 의미다. 그 표시는 양자라는 표시다.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된 예정은 그리스도의 예정과는 차이가 있다. 양자라는 표시는 그리스도의 예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를 나타낸다. 창세전에 미리 양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가 되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통일되게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이 창세기 2 1절의 말씀이다.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의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히브리어 성경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 오류가 있다. 다시 번역해보면, 하늘과 땅 군대가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곧 하나님 나라로 부터 하나님의 빛을 막으시므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흑암의 물덩어리가 창조된 것이다. 이 흑암이 얼마나 깊은지 인간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흑암의 깊이를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신다. 

“천지와 만물(차밤)이 다 이루어지니라” 개역개정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과 차이가 있다. 차밤(기본형은 차바)은 군대라는 것이다. 

[와이쿨루(이루니라) 하사마임(하늘) 워하아렛츠(땅과) 워칼() 차밤()](וַיְכֻלּ֛וּ הַשָּׁמַ֥יִם וְהָאָ֖רֶץ וְכָל־צְבָאָֽם) 이 부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지니라』 라고 번역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각종 살아있는 생명체를 만드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 하늘의 군대와 땅에 있는 군대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와 이 땅에서의 군대(범죄한 영)가 다 배치가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일곱째 날에 하늘과 땅,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지니라』 라는 말은 하늘의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다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에덴동산, 즉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말씀이다. 일곱째 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날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안식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 2 1절은 앞으로 하늘(하나님)의 하나님 나라와 땅(성도)의 하나님나라(천국이라 명함: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가 다 이루어진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에베소서 1 10-11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우리말 번역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헬라어를 통해서 다시 번역해보면,

ες οκονομαν το πληρματος τν καιρν, νακεφαλαισασθαι τ πντα ν τ Χριστ, τ π τος ορανος κα τ π τς γς ν ατῷἘν κα κληρθημεν προορισθντες κατ πρθεσιν το τ πντα νεργοντος κατ τν βουλν το θελματος ατο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을 하나로 모우기 위한 그분의 때(톤 카이론)의 완전한(플레로마토스) 경영(오이코노미안)을 이루기 위함이라. 그 분의 목적하심을 따라 예정되었으며 그 분의 뜻의 조언을 따라 모든 사역이 이루어지며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상속 유업을 얻었으니』(헬라어 번역성경)

비밀을 알게하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려주신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자가 휘포모네(그리스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임재)를 할 때, 심령 가운데, 임재하신 그리스도께서 비밀을 알려주신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예정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된다. 그 비밀이 그리스도와 교회(성도)의 관계인 것이다.

에베소서 5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사람은 그리스도이며, 아내는 하나님을 떠난 범죄한 영들이다. 그래서 범죄한 영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큰 비밀인 것이다.

톤 카이론(τν καιρν)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 안에서, 플레로마토스(πληρματος)는 가득찬, 오이코노미안(οκονομαν)은 경영이다. 가득찬 경영은 청지기라는 의미다. 청지기는 주인의 집 열쇠를 다 가지고 있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성도를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청지기로 세우시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은 마귀가 주인이다. 마치 감옥과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세상 속에서 회개하는 자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갇혀 있는 자를 석방해서 자유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성도가 가지고 있는 그 열쇠를 가지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2. 물질세계 창조

창세기 1 1-2절『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이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한다.『천지』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천지는 하늘과 땅이다.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땅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세상(물질세계)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세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로부터 분리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물질세계다.

창세기 1 1절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중요하다.『하늘(샤마임) (에렛쯔) 창조하다(바라)』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하늘(샤마임)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모든 우리가 아는 하늘을 다 샤마임 이라고 했다. 푸른 하늘도 샤마임, 우주공간도 샤마임,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도 샤마임으로 칭한다. 구약에서는 모든 하늘이 샤마임이다. 구약에서 샤마임이라고 할 때 이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앞뒤 문맥을 살펴서 3가지 중 어느 하늘인가를 생각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창세기 1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즉『샤마임과 에레쯔를 바라 하시니라』에서 신명기에서 보면, 신명기 26 15절에서『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찌니라』여기서『원컨데 주의 거룩한 처소』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하나님 나라를 샤마임으로 쓰고 있다. 이 샤마임은 창세기 1 1절에서 사용하는 샤마임이다.

열왕기상 8 30절에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열왕기상에서 말하는 하늘도 하나님의 나라로서 샤마임이다. 그러면 창세기 1 1절의 하늘(샤마임) 어느 곳인가? 창세기 1 8절에 보면 『하나님이 궁창(샤마임)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이 궁창은 창세기 7절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창세기 1 1절에서 말하는 하늘을 창세기 1 8절의 하늘과 같이 본다면 태초에 하늘(궁창)을 만들고 창세기 1 7절에 만든 하늘(궁창)이 겹쳐지므로 논리에 안맞게 된다. 따라서 창세기 1 1절의 샤마임은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1 1절에서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땅(에렛쯔)인데, 창세기 1 9절에 보면『하나님이 온 천하에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 뭍을 땅이라』하셨다. 그 땅이 에레쯔 이다. 그러면 창세기 1 1절에서 말하는 에레쯔와 중복이 된다. 창세기 1 1절에 땅이라고 말한 후 1 9절에 땅이라고 말한 것을 같은 땅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지도 모르나 창세기 1 1절에서 말하는 땅은 우리가 말하는 물질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땅에 대해서 창세기 1 1절에서『만들었다』라고 하고 또 창세기 1 9절에서도 땅이라고 했다. 즉 중복 이름을 짓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창세기 1 1절의 땅은 지구의 땅이 아닌 물질세계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물로 덮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는『바라』다. 그런데,『바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이사야 45 7절을 살펴보면『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여기서『짓다』라는 단어가『바라』라는 단어다. 여기에서『어둠』은 창세기 1 2절에서 말하는『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의 흑암과 같은 단어다.

어둠이 생기는 것은 빛이 사라지면 저절로 나타난다. 평안이 사라지면 저절로 환난이 된다. 요한1 1 5절에서『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빛을 막으시므로 어둠이 되는 것이다. 바라 라는 단어의 의미는『분리하다, 잘라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물질 세계는 하나님 나라의 빛을 막으시므로(바라) 어둠이라는 물질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물질세계(세상)를 분리해 내었다 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분리했을 때는 땅(물질세계)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이었다. 물질세계는 물로 되어 있었다.『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운행한다는 말은 알을 품은 것 같은 감싸는 의미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물질세계를 분리하셨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을 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사야 53 6절에서『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양은 시각적 분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미혹을 받기 쉬운 동물로 표현했다. 그릇 행했다는 말은 미혹에 빠졌다는 것이다.『각기 제 길(이쉬)로 갔거늘』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남자(이쉬)에게서 여자를 이끌어내었다. 여기서 이쉬라는 히브리어의 단어는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자들이 이 세상에 각자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 죄를 담당한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자들의 영을 물질세계에 내 보내는데, 육체를 가진 희생양과 같은 생명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아담이 역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하와를 분리해 내고, 그들을 통해서 후손들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영들을 육체 속에 가두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졌다. 이 유혹이 에덴동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래서 하와가 먼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유혹에 빠지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남편에게 주므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이 세상으로 쫒겨난 것이다.

에덴동산은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건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새하늘괴 새땅은 어둠이 없는 빛만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둠이 존재하는 물질세계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요한1 2 15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그러나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범죄한 영들을 구원하기 위해 물질세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흑암에 갇혀 있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심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3. 인간 창조

(1) 혼적인 존재

창세기 2 7절『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kjv)

생령은 영이 아니라 생명체()를 말한다.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같은 생명체(히브리어:네피쉬하이, 헬라어 :푸쉬케)가 된다. 형체가 된 흙에 생명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the breath of life) 가 무엇인가? 바로 영(spirit)을 말한다.

영과 흙이 만나므로 생명체인 혼이 되었다. 그런데, 이 혼적인 생명체는 반드시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죄인은 죽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가 물질 속에 갇힌 것이요, 첫째 사망이라 말을 할 수 있다.

(2) 영과 육

전도서 12 7절에서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에게로 가고,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즉 영은 흙이라는 감옥에서 해제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런데,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 거룩한 옷이 바로 혼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에서 생명체인 혼은 죄가 오염된 옷과 같은 것이다. 그 옷을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한다. 즉 새로운 혼인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렇게 갈아입는 것을 세례라고 한다.

(3) 영과 혼과 육

마가복음 14 32-35『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프로슠소마이)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카디사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프쉬케)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프로슠소마이(προσεξωμαι) 문법적으로 아오리스트 중간 디포테를 사용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지성소 기도에 해당된다. 카디사테(καθσατε)는 예수님은 기도하고 제자들은 앉아있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기도하라는 말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혼이 심히 고민되고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마가복음 14 41절에서『마음(프뉴마)에는 원이로되 육신(사륵스)이 약하도다 하시고』 프뉴마(spirit)는 영(성령)이다. 그래서 영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며, 소마(육체)로부터 온 사륵스(육신)는 육의 마음(육적자아: 일곱 가지의 유형)이며, 프쉬케(soul)는 혼이다. 혼은 영과 육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생명체(옷으로 표현)라는 의미다.

그래서 혼의 마음은 생명체가 갖는 마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구도의 길)을 생각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옛혼(옛사람)에 대한 죽음이다. 그래서 새혼(새사람)으로 부활한다. 새혼을 그리스도의 옷이라고도 한다. 베드로전서 1 9절에서는 혼의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한다.믿음의 결국 곧 영혼(프슈케) 구원을 받음이라』영혼이라 번역되었는데, 혼이다.

예수님의 사례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은 세가지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영(성령)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나가는 마음이다. 둘째, (사륵스)의 마음이다. 첫사람 아담의 흔적인 육적 자아(일곱가지 육적 속성)이다. 그리고 셋째, 혼의 마음이다. 이는 육과 영이 결합되므로서 나타나는 마음이다. 혼은 옷과 같은 것으로서 영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를 입고 있을 때는 불완전한 혼의 마음이지만, 육적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을 입을 때는 온전한 혼의 마음이 된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영의 마음이 없으며, 오직 육과 혼의 마음만 존재한다. 육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노력으로 혼의 마음을 개선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선해도 불완전한 것이다. 타 종교의 예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혼을 개선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옷은 아무리 잘 빨아도 완전한 옷이 될 수 없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시므로 모든 것을 성령이 인도하신다. 그러나 육으로부터 오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혼이 예수와 함께 죽고(불에 태워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혼(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으로 갈아입을 때, 육체 속에 갇혀있던 영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영과 육과 혼을 정확히 이해하고 구분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게 된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갈 때 고민하고 슬퍼했다고 말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위대하신 이 분도 죽음 앞에서 혼이 심히 놀라고 슬퍼했다. 육에서 비롯되는 혼은 그렇게 반응한다. 위로받고 싶어서 제자들을 동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창세 전에 계획하신 분이 이런 발언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쉽게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혼은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혼은 자기()라는 존재다. 혼은 불태워져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을 상징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바로 혼을 바꿔 입으라는 것이다. 이전의 혼을 부인하는 것이 곧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마가복음 14 36절에서『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아프 π’ 에모우 μο)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에고 γ)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σ)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여기서 문법적으로 에고(나는)는 주어이다. 에모우(나의)는 소유격이다. 아프는 ~으로부터 라는 전치사이다. 수는 주어(당신은)이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마시옵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의미상으로는 나로부터 옮기는 것이지만, 문법적으로는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이다.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것은 육적자아(사륵스)를 의미한다. 잔을 받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사역을 바라보는 육적자아에서 영적자아로 옮겨 달라는 말이다. 영적자아는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41절에서『마음(프뉴마)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πνεμα πρθυμον δ σρξ이 문장의 영어(kjv)로는 The spirit truly is ready, but the flesh is weak. niv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마음이라고 번역된 것은 오류다. 프뉴마는 영(성령)이다. 성령(프뉴마)이 이끄시지만, 육신(사륵스)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을 한다.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말이다.

헬라어 사륵스(σρξ)는 육체(body)가 아니라, 육신(fresh)이다. 육체는 살 덩어리이지만, 육신은 바로 육적자아를 의미한다. 육적자아는 육으로부터 비롯된 육적 몸(육신)을 의미한다. 이 육적 몸(육적자아)은 일곱가지의 형태로 등장한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육체의 본성(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고 그녀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육으로는 사륵스(육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은 영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육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 범죄한 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 전에 여호와이셨으므로, 육에 들어간 영은 성령으로서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영과는 상관없이 육적 몸(사륵스:육적자아)은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의 흔적으로서 누구나 다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죄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육적 몸이 죄성(탐욕)을 가지게 되지만, 예수님은 비록 육적 몸(사륵스)을 가지고 있어도 성령으로 태어난 분이므로 죄성 자체도 성립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육적자아로 인해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이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4. 언약과 믿음

마가복음 14 46-50절『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성경을 이루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언약의 성취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5 39절에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여기에서 성경은 바로 구약성경이다.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씀이다.

성경의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시고 순종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하므로, 이전의 것은 무효화되고, 새사람과 다시 언약을 체결하신다.

가장 먼저 언약을 체결한 사람은 아담이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태어난 아담을 에덴동산에 넣어주시고,『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므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다.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동물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동물의 가죽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 새언약이 바로 창세기 3 15절의『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여자의 후손은 장래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약 속에 들어가지 않은 자를 모두 심판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아시대 대홍수를 통해서 노아와 그 가족 8명을 제외하고는 멸절시켰다.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할 그런 존재라는 것을 물심판(물세례)를 통해서 알려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하셨다. 창세기 9 9-13절에서『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 언약은 장차 불로 심판하실 것(불세례)을 예고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 6-7절에서『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세상의 모든 인간은 불심판을 받아야 할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세번째 언약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장차 약속의 자녀와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언약으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동물들을 죽여서 반으로 갈라놓았을 때 하나님의 불이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 이후 13년간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브람이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할례를 행하게 하셨고, 다음해 약속의 자녀를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몸이 죽은 것같이 되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약속의 자녀를 믿었는데, 그 자녀가 바로 이삭(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할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고, 약속의 자녀 이삭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이 부활시키는 믿음인 것이다.

그 다음의 언약이 바로 시내산에서의 언약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새긴 두 돌판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두 돌판을 받을 때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돌판을 깨어버렸다.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셔서 모세에게 주셨으나, 두번째 돌판은 모세가 만들어야 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아 회복은 되지만, 그 휴유증은 남는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첫번째 돌판과 두번째 돌판은 마치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과 같은 모양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의 몸을 주고, 두번째 사람 아담은 영의 몸을 주었다. 따라서 두번째 돌판은 성도의 심령 속의 세워진 성전과도 같은 것이다. 첫번째 돌판은 깨어지고(죽고) 두번째 돌판이 새로 새겨져(다시 태어나), 언약궤 안에(성도의 심중의 성전 안에) 들어있다. 두번째 돌판은 새로운 법으로서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9 21절에서『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번째 돌판을 받고,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정탐꾼을 보냈는데, 열정탐꾼은 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모든 백성들이 그 말을 믿고 통곡하며 울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사람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시 19세 이하의 아이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새언약을 맺으신다. 그 새언약은 가나안 입구인 모압 땅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새사람들에게 당부하는 언약의 말씀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신명기 29 1절에서『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그래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맹세까지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성도에게도 일곱 족속이라는 육적 자아가 있다. 그래서 심령 속에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중간 과정에서 소금언약, 제사장언약, 다윗언약 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알려주시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언약을 깨어버렸다. 그 내용들이 예레미야에서 언급된다. 예레미야 1장에서 백성들은 이방민족의 침략을 받아 지배당하고 백성들은 끌려간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유배되어 바벨론에서 고초를 겪고, 회개하여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31 32-34절에서 새언약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대한 언약을 지켜나갔지만, 이후 다시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정작 메시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신성모독죄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들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 20 28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에『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얼마나 원하였는냐』라고 하셨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물로 죽는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누가복음 22 19-20절에서『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켜 주신다는 언약이 바로 새언약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잡히시므로, 제자 중 한 사람(베드로)이 칼로 대제사장의 귀를 쳤다. 인간적으로 보면 용감한 일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14 50절에서 나머지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고, 그 주위를 배회하다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게 된다.

오늘날도 성경을 이루려 하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나뉘어 진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와 자신의 죄를 대속한 것을 믿지만 죽은 예수를 멀리서 구경하는 자로 나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면 성경(언약)을 이룬 자가 되지 못한다.

 

5. 계명

마가복음 12 28절에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프로테: 프로토스)가 무엇이니이까』

프로테(πρτη)는 순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12 29-30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σχ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여기서 네가지가 등장한다. 카르디아스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 13절에서 『너희 마음(카르디아스)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파루시아)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카르디아스는 영적 마음이다. 파루시아를 강림으로 번역했는데, 교회 사람들은 종말 때 예수님의 지상 재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재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전에 임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번역된 것은 새사람의 몸을 입은 영적인 마음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혼을 의미한다. 이 혼은 죽어야 할 혼이다. 옷을 갈아입듯이 이전의 혼(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다한다는 말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라는 의미다.

디아노이아스는 에베소서 2 3절에서도 표현되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디아노이아스)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θελματα τς σαρκς κα τν διανοιν)으로 번역되었는데, 헬라어로 보면, “육신과 그것의 마음이 원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육적 마음인 것이다. 육적 자아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에서 농부가 굳었던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그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나라 발견하라는 의미다.

이스퀴오스는 능력 권세 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는다. 마태복음 11 27절에서『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성도 역시 그리스도로부터 이와 같은 권세를 받는다. 권세를 받는 성도는 하나님으로 오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둘째(데우테라:데우테로스)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데우테라(δευτρα)는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가장 중심은 하나님 사랑이지만, 그 다음은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아가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었음을 믿고, 함께 부활되어, 새혼을 입고, 영이 살아나므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비유처럼 굳어있는 육적 자아를 깨어(디아노이아스) 하나님을 발견하고, 옛혼이 죽고(프쉬케인 혼을 다하고), 새옷을 입은 영의 마음으로(카르디아스:영의 마음), 심령 속의 성전이 세워져 왕 같은 제사장의 권능(이스퀴오스)을 부여받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웃(교회 신도)에게도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해주어서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 바로 아가파오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앞에 부활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육적 부활이 아니라, 영혼(영과 혼)의 부활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비유적으로 네가지의 단어를 이용하여 영혼의 부활과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그런데, 서기관은『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라고 말을 한 것이다. 제사장, 서기관 등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 분이 참 메시야 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표현을 다르게 했지만, 유대지도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서로 다르게 믿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 신도들이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다. 그러나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명의 돌판을 받으러 간 사이에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제사를 한 그런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 율법주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영지주의적인 생각이 바로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마음(카르디아스)을 다하고 지혜(쉬네세오스)를 다하고 힘(이스퀴오스)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12:33)

카르디아스는 영적인 마음, 쉬네세오스는 영적인 지혜, 이스퀴오스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권능을 의미한다.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여러가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평상시에도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분이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 메시야이구나 라고 여겼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표현은 할 수 없었으나, 마치 니고데모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컸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34) 예수님은 한 서기관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지만 현재적으로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예수께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교의 출교는 죽음처럼 여겨지는 그런 시대였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오늘날 교리에 젖어있는 신도들이 교리를 벗어나면 영적으로 죽는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심령 속의 그리스도의 재림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된다. 율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며, 하나라도 어기면 심판을 받는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당시 한 서기관이 지혜롭게 대답하므로, 예수님이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고 말을 했지만, 오늘날 교회의 대부분은 지혜롭게 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4 21절을 대하는 태도때문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이 ( ) 부분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χων τς ντολς μου κα τηρν ατς κενς στιν γαπν με·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해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는(에콘 χων) 자와 그것들을 지키는(테론 τηρν) 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째되는 계명은『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σχ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계명을 가지는 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지키다” 라고 번역된 테론(τηρν)은 기본형은 “테레오”로서 방어선을 지키다, 보호하다, 상태를 유지하다 등의 의미다. 즉 성경의 규정을 행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새겨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시키는데 있다.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사랑하는 것을 규정과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규정을 지키듯이 완벽하게 지키는 자가 있는가?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규정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규정을 지켰다고 말을 한다면 무슨 근거로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사랑했다고 누가 인정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는 정말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가? 여기에 답하려고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4 12절에서『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장차 종말에는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환란이 올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인내로서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므로 이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으며,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도 “계명을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항에 대해 행동하는 것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 7절에서『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테론)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여기도 마찬가지로 “지키다” 라는 헬라어는 테론이다. 즉 보존하다, 유지하다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다. 이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단이 생기는 것이다.

이단들은 계명을 지키는 것을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적용한다. 말하자면 율법을 지켜 행하자는 말이다. 하나님이 십계명(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장차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짐승을 죽이는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 이 짐승을 대체하는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율법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지도자들은 율법주의로 확대 해석하여,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리에서 예수님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적 개념에서 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서 수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종의 형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수동적 순종의 일부라는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파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파가 있다.

율법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국가적인 법 또는 도덕법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명령하신 규례들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를 말씀한 것으로 생명과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생명과 구원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저 도덕법이라든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각 나라의 일반법과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율법을 율법 속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의 규정에 얽매인 율법주의로 바라본다면, 생명과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느니 마느니 말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단을 배척하면서도, 스스로 잘못된 교리를 말하거나 헬라어 성경과 다르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 결혼제도 비유

마가복음 10 6-9절에서『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여기에서『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 부분을 헬라어로 보면, π δ ρχς κτσεως ρσεν κα θλυ ποησεν ατος 여기에서, π(아포: ~으로 부터) δ(:접속사) ρχς(아르케:첫째되는) κτσεως(크리데오스:창조물의). 이것을 다시 한글로 다시 번역하면, “첫째 되는 창조물로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으니”라고 해야된다. 첫째되는 창조물은 아담(사람)인 것이다. 남자도 아담, 사람도 아담으로 되어있으므로 번역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사람(아담)에게서 여자(갈비뼈)를 분리해내셨으므로, 그 사람(아담)이 남자(아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은 남녀가 되기 전의 사람인 것이다.

창세기 2 21-2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이샤) 만드시고 그를 아담(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이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 21, 22, 23절의 아담은 이름의 아담이 아니라 사람(아담)이라 해야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깊히 잠들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취하신 그 갈비대로”, 라고 번역해야만 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이 부분도 히브리어를 보면, 이샤(여자) (~) 메이쉬(남자에게로) 루카하(취하여졌다) 조트(이 여자를)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이것(여자)이 남자에게로 취하여졌기 때문에 여자라 불러질 것이다.』메이쉬를 문법적으로 분석하며, 메는 민이라는 전치사(방향을 의미)의 생략형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남자와 여자로 분리된 것을 강조한다. 사람은 첫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남자(그리스도)와 여자(범죄한 천사의 영)는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을 의미한다. 곧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범죄한 천사의 영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상에 갇혔는데,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창세기 2 24절에서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이샤)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여기에서, 부모는 하나님이시다. 남자는 그리스도, 아내라고 번역되었지만, 이샤(여자)이다. 여자는 하나님을 떠난 범죄한 영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약성경 에베소서에서도 같은 의미로 강조되고 있다. 에베소서 5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안드로포스: νθρωπος)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귀나이카: γυνακα)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안드로포스는 사람 또는 남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남자로 번역함이 타당할 것이다. 귀나이카(기본형은 귀네)는 여성 또는 부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여자로 번역함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2 24절의 의미와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원래 하나님을 떠난 자(영이 흙과 결합된 존재)였는데, 그리스도를 만나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하나님을 떠났다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가 되었는데, 다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도가 율법 속에 있다가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율법 속에서 희생제물을 통하여 그리스도(복음)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는데, 그리스도를 떠나 다시 율법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제 복음 속에 있는 자를 받아드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이 복음을 거부하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만일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복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자일 것이다. 스스로 복음을 받아드렸다고 믿지만, 의미도 모른채 말로만 믿는 것이다.

마가복음 10 2-5절에서『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모세가 써 준 이혼증서는 율법을 의미한다. 영적 이혼은 하나님의 복음을 떠나 율법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 속으로 들어가는 자는 마음이 완악한 자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천국을 이룬다고 말을 하면서도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율법을 따르는 것은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마태복음 7 6절『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빌립보서 3 2절에서『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몸을 상해하는 일은 율법에 따라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개와 행악 자와 육체에 할례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율법에 대해서 다 죽었는데, 다시 율법을 적용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무시하는 개와 같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팔아서, 값을 주고 사는 교회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여전히 율법을 따르려고 하며, 죄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개와 돼지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사해졌지만,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판단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개, 돼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개와 돼지들이 교회(복음의 성도)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발로 밟고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회유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이키도록 한 것이다. 그들이 핍박과 회유를 해서 성도들을 괴롭혔다.

오늘날 교회에서 율법주의로 회귀하는 사례가 많다. 십일조가 의무조건이라든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현혹하고, 주일성수를 고집하고, 안식일을 지켜 행해야 한다거나, 신종 절기를 만들어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등의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 그들은 엄밀히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 11-12절에서『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다른데 장가가고 시집가는 행위는 복음을 두고 율법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반쪽 복음이라고 한다. 반쪽복음은 죄의 문제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육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만 눈에 들어오고 부활은 믿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의 일처럼 여긴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보혈만 적용되고 부활은 육체가 죽어서 적용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연합되어야 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로마서 6 3-5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7. 이스라엘과 이방인

로마서11 25-27절『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이『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지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누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누가는『이방인의 때』라고 했다.『이방인이 다 구원 받을 역사가 일어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사도바울이『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 이방인의 수와 누가가 말한『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에서 이방인의 때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그리스도

1. 삼위일체의 의미

(1) 삼위일체 속의 그리스도

삼위일체의 교리를 보면 삼위일체론의 초기 기원은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확장에서 시작되었다. 막 태동되었던 기독교에게 70 유대 전쟁에서 다른 유파가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바리새파 유대교와 인성을 강조하는 에피세파, 신성의 영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 등장으로 기독교 뿌리를 흔든 자극이 되었고, 육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논리적인 설명인 신학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즈음에 형성된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론과 그 그리스도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인 삼위일체가 등장하였다. 삼위일체는 점차 발전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는 세계관과 신학적 지침으로서 기독교에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위키백과의 내용을 빌려서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로 존재하지만, 본질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교리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후대 교회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위일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삼신론은 세 인격의 세 하나님이라는 이론이다. 양태론(modalism)은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성부·성자·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 인격의 한 하나님이라는 이론이다.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의 시대에는 성자로, 신약 이후에는 성령으로 활동한다는 주장이 양태론이다. 종속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온전히 하나인 주체이나,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양자론은 하나님이 예수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삼위일체 찬성 교파와 교단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구약성경, 신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보편교회 시대의 신학적 기준을 사도적 지침이라 여기고 수용하는 교단들이다.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 개신교회 교단들인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다.

삼위일체 반대 교단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교파로, 현재 주류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배교라 여기고, 초대교회에서 보편교회 시기를 지나며 현재 교회가 배교로 단절되었으며, 삼위일체 역시 단절의 이론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단절을 잇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교리를 거부하는 회복주의 성향들로 여호와의 증인,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 유니테리언 등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세분이 아니라 한분이시나, 하나님 나라의 범죄한 천사들을 세상에 가두고(인간을 포함한 천지창조), 그들을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구원)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경 귀절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1 9-11절『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부 하나님이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땅에 초림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는 모든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오신 분(메시야: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하는 모든 사역을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하나님 자리를 떠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누가복음 4 6-7절에서『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것이 되리라』라고 말했다. 사탄은 아들 예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하고, 성부 하나님 자리에 앉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호와이시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오셨을 때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다. 누가복음 4 8절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대답하시기를『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대부분 신도들이 예수를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신격화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자)인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하여, 예수를 믿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동일시 한다.『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라고 말을 할 때, 그들의 눈에는 예수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아들 예수의 피를 요구하게 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교회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말을 하면서도 성자 하나님이라는 말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4 13절『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엔 아우토)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을 주시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세분의 하나님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엔 아우토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역시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 안에 있게 된다.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성도의 삼위일체를 표현하고 있다. 

요한일서 4 14-15절『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도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는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의 무리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던 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되며, 성부 하나님이 성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도간의  삼위일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나타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성령, 성도간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도간에도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사상은 하나님과 성도가 하나됨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인 것이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범죄한 천사로 인하여 분리되었으므로, 다시 하나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마치 세분의 하나님이 위격으로 있는데, 하나라는 모호한 설명으로 삼위일체의 의미를 하나님에게만 집중한다면 본래의 그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2)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히브리어로 하야 아세르 하야라고 부른다. 엘로힘의 어근은 엘이며,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리고 야훼라는 이름의 근원은 아도나이에서 시작된다. 아도나이도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여 성경을 기록할 때 공란으로 했다고 하며, 칠십인경을 만들 때 YHWH라고 표기했는데,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알파벳 Adonai의 표기에서 a ai YHWH에 붙여서 YHaWHai(야훼)로 부르면서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 기록한 성경 원본은 공란이었을 것이며, 이후 사본으로 필사할 때 야훼(ְהוָֽה)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모세가 출애굽기 3 13-14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나는 스스로 있는 자(개역개정)』라고 하셨다. 히브리어는 하야 아세르 하야이다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이 『하야 아세르 하야』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하야께서 나를 보내셨다 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야 아세르 하야를 줄여서 하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야는 사전에서는 영어로 be동사에 해당되는 ~이다(존재) 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완료도 아닌 미완료도 아닌 진행형의 존재라는 것이다. 사전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미이다.

그러나 구속 사역적인 의미를 생각해야만 알 수 있다. 하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이름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육체로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오시므로 하야 아세르 하야인 것이다.

하야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하야는 파자를 하면 알레프 즉, 은혜의 창으로 오셔서 권능의 말씀으로 마치시고 다시 은혜의 창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이시다. 두번째 하야는 예를 들어 아담이 몇 년을 향수하였더라 에서 향수하였다는 말이 하야다. 알파벳은 바브 요드 헤 요드 바브이다. 양쪽 끝에 바브가 있는데, 세상에 말씀의 은혜로 들어왔다가 말씀의 은혜로 나오는 것이다. 물질세계에 잠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을 향수하였다는 말이다. 요드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6 7절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야 아세르 하야라는 말에서 처음과 끝의 하야(하나님 나라의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이다 라는 의미가 된다.) 가운데, 아세르가 있다. 알파벳의 철자는 알레프 쉰 레쉬가 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분리된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세상으로 분리되는 것이 모두 같은 의미의 분리(바라). 히브리어 바라는 창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나, 이면적으로는 분리된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야와 하야 사이에 아세르가 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세상으로 부터도 분리되는 것이다.

“하야 아세르 하야”에서 뒷부분의 하야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도 계셨다고 증언한다. 왜 세상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는가? 그의 백성인 범죄한 천사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범죄한 천사들은  첫사람 아담과 함께 육의 몸으로 물질세상에 왔으며 그들은 회개하여 의의 몸을 입고 마지막 아담과 함께 보좌의 우편에 앉게 된다. 땅의 그리스도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보좌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다. 누가복음 3 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면 아담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비록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세상에 피조물보다 먼저 나셔서 첫사람이 되셨고 마지막 아담으로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셨다.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면 땅과 하늘이 하나로 충만하게 된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를 다 이루셨으며 안식에 들어가셨다. 이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모든 것이  안식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도는 첫사람 아담의 흔적도 있고 마지막 아담의 은혜도 있다. 육체 속에 죄에 대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옛사람이 있으며 심령 속에 새생명으로 나게한 새사람도 있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이 있으나 남자와 여자로 분리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찾는 종교심(사륵스) 이 남아있어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자도 있고 깨닫지 못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  옛사람은 율법 속에 있으나 새사람은 성령 속에 있는 것이다. 여전히 죄인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의인이 된 것도 아니다. 다만 성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우측 강도와 같은 자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란 무엇인가? 그게 바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인 것이다. 세상에서 짓는 죄의 문제가 핵심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깨달으면 날마다 죽노라가 고백된다. 첫사람 아담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아담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다 이루신 것이다.

 

 2. 예수님의 정체성

마가복음 9 1-3절에서『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당시 유대인들과 심지어 제자들은 혼란을 겪는다.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가 엘리야나 모세가 환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은 예수를 신, 또는 반신안인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만일 부활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이 보여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들은 부활의 장면을 보았을 때 예수를 신으로 생각할 것을 예수님은 우려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자 곧 사람이셨다. 부활하기 전의 예수는 신도 아니고, 반신반인도 아닌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호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취지는 이해가 가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가 신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와 같은 개념이다.

마가복음 9 4-5절에서『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를 본 제자들은 그들을 신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잘 아는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변신하여 올라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도 얼굴에 광채를 나타낸 것을 모세오경을 통해서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초막(성전) 세개를 지어 예배하겠다는 표현이다. 이게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예수를 신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이 정의를 내려주신다. 그는 나의 아들이고 죽고 부활하기 위한 사역을 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므로 그의 말을 따르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9 6-7절『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어떤 제자들은 예수를 엘리야가 환생했는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말라기 3장에서 선지자가 한 말을 두고 서기관이 그렇게 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마가복음 9 11-12절에서『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두고 엘리야가 먼저 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엘리야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죽고 부활하는 사역을 맡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9 13절에서『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십자가의 사역을, 그리고 세례요한은 십자가의 사역을 위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곧게 하셨다.

마태복음 3 3절『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테 에레모 τ ρ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테 에레모(τ ρμ)는 하나님을 떠난 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세상에 던져진 자라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구불구불했다면, 세례요한이 이제 곧게 만들어서 나아가기 좋게 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말라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백성들을 돌이키겠다』고 하셨다. 이 말라기 선지자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영이 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세례요한이다. 그래서 그 일을 세례요한이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 17절에서『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자식은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거스르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세례요한)이 준비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부르짖는 요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므로 회개하여, 율법 속에서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길을 평탄케하고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비로 이 일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키면, 의인이 되는 것처럼 믿고 있는데,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 율법 속에서 자신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로 방향을 돌이켜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주실 것이다 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에 와서, 앞길을 평탄케 하는 말(회개하라)을 했지만, 유대인들의 지도자 급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깨닫지 못했다.『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예수님도 세례요한과 같이 임으로 대우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40 3절에서『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말에서 광야와 사막은 어디를 말하는가? 세례요한이 외치는 광야와 사막은 바로 이스라엘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별개하고 생각했으며, 대부분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다. 그런데, 육체가 죽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도 보여주셨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메테모르포데 μετεμορφθη)』”변형되사”에 대한 영어 번역은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kjv,niv)라고 되어있다. 메테모르포데(μετεμορφθη)는 메테(되돌아가다)와 모르포데(하나님의 본체) 의 합성어이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을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부활은 모양이 바뀌는 것이다. 즉 다른 존재가 된다. 영어로 transgigure라는 말이다. Change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서서히 변화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가죽옷에서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에서 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도 역시 부활하면, 그런 상태가 된다. 천사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한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부활은 옛혼에서 새로운 영의 몸이라는 혼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옷이 희어지는 것은 이전의 옷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

 

3. 십자가의 죽음

마태복음 20 28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에『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얼마나 원하였는냐』라고 하셨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물로 죽는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 54절에서『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했다. 그런데 6 40절에는『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하셨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믿는다』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다른 종교처럼 대상에게 의지하거나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그런 말이 아니라,『연합한다』라는 말이다.

『인자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말은 예수와 연합한다』는 말이다. 내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모든 자는『예수와 연합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이다.

누가복음 22 19-20절에서『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 즉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53 1-6절에서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모든 인간들이 감당하여야 할 벌을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한다면 죄를 대신 죽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다. 많은 천사들이『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옷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영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이 세상에 쫒겨와, 육체 속에 영혼이 갇힌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요,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지은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육체 때문에 생긴 두가지의 걸림돌이 있다. 바로 죄악이다.

육체 속에 들어있는 악(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속성:옛사람)과 세상 속에서 옛사람으로 인해서 지은 모든 죄를 제거하고 돌아가야만 한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제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는다. 죽는 것은 죄에 대해서 그리고 악(옛사람)에 대해서 죽는 것을 믿는다.

죄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대속하여 죄가 죽지만, 나의 옛사람은 내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어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옛사람인 내가 죽어야만 한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악한 옛사람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와 더불어 십자가에서 죽지만, 옛사람이 죽는 주체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악한 옛사람도 해결해 주었다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셨다.

로마서 6 3-7절에서 말하고 있다.『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4. 부활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부활에는 관심없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으므로 언젠가 신도들도 죽고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부활은 죽은 후에 육체적 부활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살아 생전에 부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육체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죽은 후에도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죽은 시신을 냉동해서 보관하여 언젠가 소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자들도 있다.

부활과 소생은 엄연히 다르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여러 번 살리셨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렸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으며,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 바울이나 베드로 역시 죽은 자를 일으킨 예도 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은 영생의 몸이 아니라, 흙에서 온 육체이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전도서 12 7절에서『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으므로 그것을 부활로 생각할지 모르나, 부활은 육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다. 육의 몸은 죽고 영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42-44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5 16-18절에서는 씨를 비유하면서 씨는 땅에 떨어지면 죽지만, 그 속에 있는 생명이 있으므로 생명이 형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씨 속에는 떡잎 모양의 생명이 있다. 사람으로 말을 하자면, 영이다. 요한복음 6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에서 살리는 주체는 성령이고, 살리는 대상은 죽어있던 영이다. 그래서 씨 속의 생명은 영이나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이라는 형체를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영이 영의 몸을 입으므로 부활이라는 영광체로 태어난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5 49-50절에서 썩을 몸은 하늘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을 한다.『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영의 몸은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몸이며, 그리스도의 옷이며,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신령한 몸이다. 변신하고, 공간의 제약이 없으며, 영생하는 몸이다. 육의 몸이 변하여 영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육의 몸은 죽고, 영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새창조라고 한다. 부활은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보혈만 강조한다.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부활이 빠진 교회는 반쪽짜리 복음이 된다. 그래서 성경대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목사들이 성경 대로 살지 않으면서, 신도들에게 성경대로 살자고 말을 하는 격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와 죽은 후에 부활될 것이라고 믿는 자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천국)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금 현재가 아니라, 미래 어느날(종말)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성령이 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따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여전히 신봉한다. 심지어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다. 마치 세분의 하나님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현재적 그리스도의 재림도 없으며, 심령 속의 천국도 없으며, 심령 속의 천년왕국도 없으며, 심령 속의 생명책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승천한 것도 믿지 못할 것이다. 골로새서 3 1-3절의 말씀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자신의 정체성이 육에서 영으로 바뀌었으며, 육의 정체성은 죽고, 영이 영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보좌에도 있으며, 성도의 심령 속에도 계신다. 따라서 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보좌의 하나님 안에, 그리고 심령 속에도 있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들이 성경대로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한다. 부활은 이전의 것은 사라지고, 새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5. 재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이 땅에 사십일간 머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마친 후에 제자들이 보는 상황에서 승천하셨다. 그런데, 사도행전 1 11절에서『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엄밀히 제자들이 본 장면은 하늘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심령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과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과는 다른 사건인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다. 삼위일체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셋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인 것 헷갈리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인 것을 성도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을 믿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세분이 아니라 한분이시나, 하나님 나라의 범죄한 천사들을 세상에 가두고(인간을 포함한 천지창조), 그들을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구원)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 자리로 돌아갔음에도 재림할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여긴다면 곤란한 것이다. 실례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은 그리스도와 다른 분인가?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성령 따로, 그리스도 따로, 성부 따로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분의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기는 곤란하므로 세 위격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말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있을 때는 그 이야기가 받아드려질 수 있어도 현재의 상황에서 삼위일체를 따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성도에게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믿지 않는 신도(기타 사람들)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에게는 심판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물론 마지막 날에 성도가 아닌 자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주로 오신다. 이것이 백보좌 심판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신도에게는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재림을 가다린다고 하는 신도들은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재림을 기다리는 신도들은 여전히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들이다.

성도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성도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 마태복음 3 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천국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성도의 주인이 되므로, 성도의 이름은 십사만사천이 되며, 천년왕국의 왕이 되고,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종말에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믿는데, 현재적 부활을 믿고, 현재적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자에게는 지금 바로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며, 왕노릇한다는 말이다. 사탄이 세상 왕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왕노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았으면, 당당히 진리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비진리에 갇혀있는 자를 구출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

 

1. 그리스도의 일꾼

디모데전서 1 6-7절『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헛된 말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했다. 당시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목회하면서 당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였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문자적 조문에만 신경을 쓰고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율법주의적으로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계명의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 속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오늘날 율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로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이들은 영적인 통찰력 즉 깨달음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고 믿었기에 이들과 큰 마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디모데에게 헛된 말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했다. 이들은 유대교의 신화들과 끝없는 족보들을 늘어놓는 목적이 자기자랑에 있을 뿐 거룩한 삶, 믿음의 삶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몇가지를 부탁했다. 먼저 디모데에게 하는 말씀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능력을 통해 헛된 말에 유혹당하지 말고 당당히 싸우라고 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 적용되는 대상이 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지혜롭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질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회개하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 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회개없는 구원은 없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악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말로만 회개하고 죄악으로부터 돌이키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살피며 선한 양심과 믿음을 지킬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처럼 헛된 말과 믿음 없는 마음으로 하지말라고 권면한 것이다. 선한 양심으로 번역된 것은 원어를 통해서 볼 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믿음이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통해서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다. 헛된 말에 유혹당하지 말고 싸우며,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믿음 속에서 목회를 해 나가라는 것이다. 헛된 말들은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를 의미한다.

바울은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2가지 신앙의 권면을 하고 있다. 먼저, 기도에 대해 말했다. 바울은 기도를 언급하며, 간구(데에세이스 δεήσεις)와 기도(프로슈카스 προσευχάς)와 도고(엔튜세이스 ντεύξεις)와 감사를 언급했다. 데에세이스는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프로슈카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도고라고 번역된 엔튜세이스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의미한다.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중보자를 통해서 기도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라고 말들을 하는데, 잘못된 표현이다. 그 사람을 대신해서 기도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대신이 아니라, 합심기도인 것이다.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셈노테티 σεμνότητι)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셈노테티는 위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당시 교회는 로마 제국의 위협아래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유가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고 해서, 이런 생활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복음이 목적인 것이다. 전쟁이 나서 시끄럽고 혼란되면 복음에 지장이 생긴다.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로 한 몸을 이루는 자들이 자신의 의를 버리고,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버리고, 창조의 질서아래 올바른 마음과 태도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의 씨가 없는 자는 정숙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초신자들은 아직 하나님의 씨가 없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도 말씀의 씨가 잉태되지 않으면 씨가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의 죽음이 믿는 자의 죽음이 되지 않으면, 말씀을 들었지만 아직은 씨가 없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은 먼저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사랑)을 깨닫게 되고,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거룩함)에 거해지면 구원을 얻게된다는 말씀이다.

 

2. 복음 전파의 사명

하나님이 사도를 세우시고, 전도를 통해서 영생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이다. 사도의 목적은 영생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못된 신앙은 유대인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인본주의적 전통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모두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에서 나아가, 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남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지만, 현재와 미래의 죄에 대해서는 계속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죄를 회개한다고 말을 하면서, 예수의 피를 날마다 요구하며, 날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활도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육체가 죽어서 부활한다고 믿으므로, 현재적으로 부활생명이 없는 것이다.

빌립보서 3 10-11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전 세계에서 매년 어느 도시에서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연합 예배를 드린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교회가 하나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도에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가는 별개의 일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삼년 동안 사역하시면서『나는 이 땅에 온 이유가 대속물로 죽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자주 하셨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형이 집행된 다음에 빌라도를 찾아온다.『저 자가 살았을 때에 삼일 만에 살아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니까 거짓말이 퍼질 수 있으니까 보초를 세워달라』이렇게 말을 했다. 믿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랐던 그들은 기억조차 못했다.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 풍랑을 잠재운 것을 직접 목격하고, 죽었던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것을 보았던 자들이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 땅에 내려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을 직접 본 제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 부활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여자들이 먼저 새벽에 무덤에 다녀왔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세마포가 개어져 있고, 천사를 만났다는 소리를 들었다.『예수님이 부활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고 천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뛰어간다.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자주 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 사는 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고 있는가? 혹시 세뇌당한 것은 아닌가? 하도 많이 들어서 외워진 것이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믿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말 부활을 믿는가? 그리고 신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자임을 믿는가? 많은 교회 사람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믿는 자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부활은 놀라운 소식이고 그것을 믿는데, 부활의 소식은 있지만 부활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부활을 외쳐도 우리에게서 부활의 능력을 보지 못하므로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외식에 돌이켜야만 한다.

믿는 사람들에게 절망이 와도 알 수 있다. 절망과 부활은 같이 함께 할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시다고 믿는다면, 신도 역시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절망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절망이 들어오려고 해도 밀려 나갈 것이다. 불빛이 있으면 어둠이 들어올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바리새인의 외식이 되지 말아야만 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으면 이 부활을 전해야만 한다.

 

 

3. 성령의 은사

교회사람들 대부분은 방언에 대해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결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히브리어 외에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던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인, 가바도기아인 등 여러 나라에서 온 디아스포라들이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2 11절에서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을 말할 때, 반응이 두가지인 것이다.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의 출신들인데, 어떻게 이런 외국의 말들을 하는가 라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라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이 제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큰 일을 들어보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술취했는가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횡설수설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말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 이며,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당시에는 정말 술취한 자로 취급받는 것이다. 사도행전 2 17절에서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요엘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주었다.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말한 것의 핵심은 여러 나라의 언어인 방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도 방언 기도를 한다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핵심은 어떤 내용을 두고 기도하는가 라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소통에서 수단인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은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내용이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방언기도인 것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나의 영이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도가 주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세상적인 기도는 마음에 열매맺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에 관심이 있지 육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요한복음 6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kjv)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영적인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비밀은 에베소서 5 31-32절의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이 큰 비밀이라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큰 비밀을 말하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언과 다른 것이다. 영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역하는 자(상세하게 설명하는 자)가 필요한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사람들에게 영에 대해서 말한다면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영에 대한 큰 비밀이 무엇인가?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무대로 보여주는 연극과 같은 것이다. 많은 영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없이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나님을 떠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만들어 범죄한 영들을 흙속에 가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흙속에 갇힌 영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므로 영이 죽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고, 부활하셔서 믿는 자들의 열매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였지만,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자는 영이 영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방언은 이와 같이 영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외국어로 말하는 것과 같이 알아듣는 자가 없다. 하나님은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의 영을 살려주신다. 그래서 영은 영으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영에 대해서 말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므로 누군가 통역해주는 자가 필요한 것이다. 두 세사람이 함께 영에 대해서 보완적으로 설명을 하므로서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통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설명해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큰 일이요, 큰 비밀인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계시(그리스도)가 된다. 방언의 이야기와 예언의 계시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

방언만을 말하거나, 계시만 말을 하는 것도 불완전한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큰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해서는 함께 이야기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한 쪽만 말한다면 악기를 다룰 때 불협화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방언, 즉 영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개인의 덕을 쌓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영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의 계시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덕을 쌓는다. 교회는 곧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방언과 예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영에 대한 이야기이고, 예언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교회 사람들은 육에 관심을 갖는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교회 사람들은 영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지만 관심도 없는 것이다. 영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들은 외국인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는 영의 이야기는 단지 외국어(방언)로 들릴 뿐이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영적인 이야기가 이해되면,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영에 대한 이야기와 예언의 계시에 대한 이야기가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교회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남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온 그리스도, 여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나 자기의 의를 이루어보겠다고 하는 영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여자는 교회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자를 상징한다. 고린도전서 14 34절에서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생각을 섞어서 잘못 말하는 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 33절에서『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행함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방언이나 예언을 하면 큰 능력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말고, 그런 은혜를 받았으며, 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가를 기억하고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떠난 사실을 깨닫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잠하라는 것이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남편에게 묻는 자는 여자가 아니라 아내다. 아내는 결혼한 사람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어떤 것을 여쭈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교회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지적한다.

 

. 천년왕국과 지옥

1. 천년왕국

천년왕국은 천국의 다른 이름이다. 신도가 사탄(검사)으로부터 시험을 통과하여 음부로 가지 않고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성도가 천국의 시민이 되면 그는 천년왕국에 있는 것이다. 천년왕국 또는 천국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천국(하늘나라)은 헬라어로『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포괄적인 의미의 개념이다.

천국(천년왕국)은 성도가 육체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3 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라고 말하는데,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자이며, 그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져, 그리스도가 그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올 때, 천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온 것을 믿지 않는 자이며, 그에게는 천국이 임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 1-3절『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위에 인봉하여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 에드네)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천년 동안 사탄을 무저갱에 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사탄이 죄인을 고소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정기간 중지되는 것이다. 천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의 개념이다. 천년동안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천년왕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천년왕국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의미한다.

천년왕국이 되지 못하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이다. 부활을 이루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에베소서 2 2-5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천년왕국의 교회인 성도는 하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잠시 사탄의 기소권을 회복해 준다. 사탄은 여전히 죄인을 기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사와 변호사는 다시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제자들인 성도 역시 사탄과 그의 사자들과 싸우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승리하게 된다.

 

2. 지옥과 음부

지옥은 교회 사람들이 불타는 지옥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의미가 왜곡된다. 성경에서는 교회사람들이 생각하는 “불타는 지옥”의 의미가 타르타로, 하데스, 게헨나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첫째, 타르타로 대해서는 베드로후서 2 4절에『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로)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로 표현되었다. 지옥이라고 표현된 타르타로는 영이 육체 속에 갇힌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므로 지옥에 있는 것이다. 현재적 지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천국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

둘째, 하데스는 음부를 의미하는데, 음부는 둘째 사망을 나타낸다. 곧음부는 불을 상징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 14절에서『사망과 음부(하데스)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음부로 표현된 하데스는 갇히는 지옥의 개념이 아니라, 불을 받는 것이다. 즉 둘째 사망을 나타낸다. 둘째 사망이 곧 불뭇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첫째 사망은 영이 흙에 갇히는 것을 영적으로 첫째 사망으로 본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네크로스)이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성령의 불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는 의인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 9절에서『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불은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옛사람은 불세례로 죽고 성령세례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그리고 성도에게 연단의 의미로 주는 불이 있다. 불세례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의미가 있고, 불은 연단의 의미를 갖는다.

최초의 불세례는 창세기 19 24절에서『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며, 롯과 가족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베드로후서 2 7절에서『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불세례는 심판과 구원을 나타낸다. 당하는 쪽은 심판이고, 피하는 쪽은 구원인 것이다. 소돔성에 있는 자들은 비진리에 있는 자들이고, 고통당하는 롯은 진리에 있는 자인데, 하나님이 불세례를 통해서 진리에 있는 자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불세례는 옛사람(육적 혼이라는 옷)을 불로 태우고 새사람(그리스도의 옷)을 만드는 것이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 둘째 사망(불세례:십자가의 죽음과 연합)을 통과한 자는 첫째 부활(새사람)에 참여한다. 요한계시록 20 4-5절에서『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함께 부활하여 천년왕국(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천년왕국이라는 개념은 기간의 개념이 아니라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그래서 첫째 부활은 성도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째 부활이 이루어지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는 말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20 6절에서『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은 대조된다. 둘째 사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상징하므로 더 이상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성도는 더 이상 영적으로 죽음이 없는 것이다. 이게 부활이다. 물론 육적으로 사망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요한복음 5 25절에서『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인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죄인임을 회개하여 돌이킬 때,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활은 육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영의 몸)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골로새서 1 13절엑서『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에베소서 2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에게이로:부활, 과거형)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승천, 과거형)』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천국을 의미한다. 구원은 사망의 나라(율법)에서 불세례를 받아 영생의 나라(성령세례)로 이동하는 것이다.

심판과 구원은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이다. 성도에게 심판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물세례:죄에 대해서 죽고, 불세례:혼에 대해서 죽고, 둘째 사망), 성도에게 구원은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언젠가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 심판받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지금 현재의 이야기가 된다. 지금 현재 영생을 소유하면, 천국이며, 그렇지 못하면 지옥이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20 15절에서『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κα ε τις οχ ερθη ν τ ββλ τς ζως γεγραμμνος, βλθη ες τν λμνην το πυρς. 여기에서 휴레데(ερθη: 발견하다) 라는 말이 번역되지 않았다. 누구든지 생명책에서 이름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진다는 말이다. 생명책은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 있지만, 그 생명책을 펼쳐서 이름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지옥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름은 깨닫는 자만 알게 된다는 말이다. 심령 속에서 죽었던 영이 부활하여 일어나면, 성전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께서 그 성전으로 들어오시게 된다. 그래서 그 이름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연단하는 불이 있다. 불은 누가 만드는가? 불은 그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심판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불을 허락한 이유는 베드로전서 1 7절에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요한계시록 3 18절에서『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불은 연단의 의미를 갖는다. 살아있는 동안 지옥불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연단을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이다. 그 연단이 금을 만드는 것이다.

신도가 불의 의미를 깨닫고 비진리에서 벗어날 때 그것은 금이 된다. 마치 롯이 소돔성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옥 같은 비진리에서 고통받는 신도가 그곳으로부터 나와 진리에 들어갈 때 천국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은 이전의 비진리(육적 자기)에서 나와 진리(영적 자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잘못되어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회초리는 불로 여겨지지만, 결국 좋은 인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무서운 분으로 여기는가 사랑으로 여기는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결국 신도가 불을 구원의 길로 인식하면, 그것이 천국으로 인도하지만, 고통으로 인식하면 지옥불이 된다. 성도가 영적으로 지옥을 경험하고 연단받지만, 곧 진리로 나아갈 때 천국을 누리는 자가 된다. 그는 십사만사천이라는 이름의 성도가 되며, 천년왕국이며, 새하늘과 새땅이 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성도가 살아있을 때 경험하며, 죽을 때까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속에 있는 육적인 것과 싸워이겨야 하는 것이다.

셋째, 게헨나는 쓰레기를 불로 태우는 의미를 갖는다. 불은 연단의 의미도 갖지만, 연단되지 않는 불은 고통을 주는 불이 된다. 그런데, 게헨나를 지옥으로 번역하므로 의미가 혼란스럽다. 마가복음 9 47절에서『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게헨나는 성소의 마당에서 희생제물을 잡고 그 동물의 사체를 성문 밖에서 태우는 것을 의미한다. 쓰레기 처리장인 것이다. 예레미야 7 31-32절에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힌놈의 골짜기에서 게헨나가 나타났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밖 남동쪽의 쓰레기 장이었다. 동물의 사체를 태우는 것이다. 사체에서 구더기가 나온다.

마가복음 9 48절에서는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그런데,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몰렉에게 자녀를 태워 제사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성전의 타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을 비유하자면 교회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서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타락한 교회 안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지옥으로 번역된 게헨나와 타르타로와는 다른 개념이다. 타르타로는 갇혀있는 어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지만, 게헨나는 지옥이라기 보다 불로 태우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쓰레기를 불로 태운다는 의미는 불세례와도 다른 이야기다. 불세례는 구원과 심판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게헨나는 쓰레기를 태우는 의미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혀의 불로 다른 사람을 불로 태우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도 불로 태우려는 것이다. 신도가 자기를 태울 때는 연단이 되지만, 타인을 불로 태울 때는 그야말로 지옥불이 된다. 그는 지옥불에 사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모든 사람에게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육체가 죽어서도 연장되는 일이다.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천국이 되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지옥이 된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회개하여 불세례(둘째 사망)를 받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천국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불로 연단을 받아 더욱 정금과 같이 된다는 말이다.

불세례를 받은 자가 첫째부활에 참여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육체가 죽은 후에 둘째부활이 이루어져 불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의미한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3. 영적 전쟁

영적 전쟁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영적 전쟁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그 대상에 대해 거의 대부분 사탄 또는 악한 영으로 말할 것이다.

영적 전쟁도 육적인 전쟁과 마찬가지로 피아식별을 할 줄 모르면 전쟁에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을 하게 되는 나는 누구이며, 그 대상은 누구와 싸우는가를 알지 못하면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유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기라는 정체성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모르면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나타나는 자아는 바로 육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 육적 자아는 대략 일곱가지의 특성을 갖는 집합체 형식으로 되어있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발전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 자아는 하나님과는 적대적인 대립을 세우기 때문에 육체 속에 갇혀있는 영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거부한다.

우리는 영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바르게 설 수 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육체와 영이 결합된 존재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영은 흙이라는 육체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을 하자면, 세상에 살다가 죄를 범하여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어떤 사람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세상에서 입던 옷과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번호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일정기간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감옥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죄수복에 적힌 번호가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 속에 갇힌 영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육체 속에 갇혀 있으며, 혼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감옥 속에 갇혀있는 자가 자신의 이전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부모를 기억하고 자신이 살던 집을 생각하고, 함께 살아온 가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만 영적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씨뿌리는 비유로 설명한다. 흙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경작하면서 생명의 싹이 자라듯이 육체 속에 갇힌 영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묵상과 성경의 말씀을 읽으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말씀을 하기를 영이 육체 속에 갇힌 근본적인 원인은 영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그게 탐심이며,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죄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창세기 2 17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죄인은 두번 죽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죽고 죽으리라) 하시니라. 한글 번역 성경은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은 죽고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두번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나 흙에 갇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자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게 회개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첫번째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물세례이다. 로마서 6 3-7절에서 세례와 죄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사람은 스스로 죽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십자가의 죽음으로 회개하는 인간들을 대속하는 것이다. 단지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것 뿐만 아니라, 함께 죽었음을 믿게 하여 죄인도 역시 죽으므로 죄를 사면받게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성도가 된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백보좌 심판은 율법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된다.

두번째 죽음은 혼의 죽음이다. 이것은 불세례이다. 이전의 옷을 벗고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혼은 육체와 영이 만나서 인간이 되는 가죽옷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첫사람 아담에게 입혀주신 옷이다. 그런데, 이는 육체로 비롯된 옷이므로, 그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성령세례인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자는 새로운 옷(영의 몸)을 입으므로 영이 빛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43-44절에서는 영의 몸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설명하였다. 영의 몸을 부활한 자의 몸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육체가 있으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자신이 부활한 자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옷을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한 것을 믿을 때,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 이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셋째 하늘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게 재림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는 성도의 심령 속에 천국이 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육체로부터 나타난 자기의 정체성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자기 정체성이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피아식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참된 나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정체성이고, 나의 적은 다름 아닌 육으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대상은 육적 자아이며, 부인해야 하는 주체는 영적 자아인 것이다. 이 둘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영에 대해서 감옥과 같은 곳이다. 세상에도 감옥을 관리하는 자가 있다. 교도소장이 있으며, 부하 직원도 있을 것이다. 죄수를 법으로 통제하고, 불법을 저지를 때는 법으로 처벌하고, 노역도 시킬 수 있다. 영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죄인에 대해서 악역을 맡은 공무원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도소장은 사탄, 그 밑에 있는 자들은 악역을 맡은 천사들이다. 그래서 어두운 영(마귀 등)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자신이 맡은 바 역할을 다 할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에 대해서 두 번 죽은 자에 대해서는 세상(교도소)을 떠나기 전이라도 죄없음을 인정하는 도장을 찍어준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악역을 맡은 간수들이 더 이상 간여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육체로 인해서 세상에 살아갈 뿐인 것이다. 요한1 3 9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1 5 18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다만,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났더라도, 사탄이나 어두운 영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육적 자아가 괴롭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4. 구원받는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에베소서 2 8-9절『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영적 어린아이처럼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과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친다. 그런데, 성령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에베소서 4 13-15절『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τν ντητα τς πστεως κα τς πιγνσεως το υο το θεο 하나님 아들을 믿는 것(피스테오스 πστεως) 과 아는 일(에피그노세오스 πιγνσεως)에 하나가 된다는 말은 번역이 잘못되었다. 하나님 아들의 믿음과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히 아는 것(히브리어 야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서로 하나님 아들의 믿음과 성부 하나님과의 앎(히브리어 야다)을 통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크기에 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아들의 믿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하나님 아들의 믿음은 구원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고 성부 하나님이 부활시키신다는 믿음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성부 하나님과의 앎(야다)를 통해서 하나가 될 때 온 세상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될 때,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으로 이루어 나가게 된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성도가 회심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죄인이 회심하여 곧바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귀납법적이 아니라, 연역법적이다.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이 먼저 선언해주신다.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시민권을 갑자기 얻었다고 생각을 할 때, 그는 미국인이 되겠지만, 미국에서 삶을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할 것이다. 언어,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부족한 상태로서 완전한 미국인이라고 볼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장애물을 이겨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데, 장애물은 성도의 육적인 자아가 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

갈라디아서 5장은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데, 지침서와 같은 것이다. 이를 바라보면서 장애물을 이겨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으로 난 자와 율법 아래 있는 자에 대해서 성경은 대비한다. 갈라디아서5 19-21절에서『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그리고 5 22-23절에서『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2 1-2절『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2 1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육신의 정욕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육신의 열정들이다. 육적인 자아는 대략 일곱가지로 나타낼 수 있는데,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베드로후서 1 4절에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에팡켈미타)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θεας κοινωνο φσεως)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에팡켈미타(παγγέλματα) 는 약속인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주시려는 약속이다. 『데이아스() 코이노노이(참여하다) 퓌세오스(본성) θείας κοινωνο φύσεως 』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신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신의 성품은 마치 인격적 의미를 나타내지만, 신성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성도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품은 변하는 모습이지만, 신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래서 교회 목사들 중에는 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연결해서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신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데, 그들은 신의 성품(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 5-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스푸덴)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스푸덴(σπουδν)는 열망으로서, 신성에 참여하는 열망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여덟가지 덕목이 등장하는데, 마치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믿음 안에 덕이 있고, 덕 안에 지식이 있고, 지식 안에 절제가 있으며, 절제 안에 인내가 있고, 인내 안에 경건이 있고, 경건 안에 형제 우애가 있으며, 형제 우애 안에 사랑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더하라』는 말이 영어성경(niv)에는 『노력하라:make every effort to add』는 말로 번역되었다. 물론 킹제임스 번역은 『주어진다(giving)』로 되어있으며, 헬라어 원문에는παρεισενέγκαντες(파레이세넨칸테스:적용하다)   πιχορηγήσατε(에피코레게사테:주다)(여덟가지 덕목이) 주어지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신성이 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덕(탁월함)이 생겨나고, 지식(하나님과의 하나되는 관계)을 통하여 은사를 받게되고, 그래서 사람이 교만해질 수 있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절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내(휘포모네)로 연결된다. 휘포모네는 주님의 보좌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유세베이안: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형제사랑과 아가페 사랑이 이루어진다.

베드로후서 1 5-7절 역시 성도의 지침서가 된다. 이를 기억하고 보면서, 영적 성장을 이루어 나가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역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계속 성장해간다. 자기 육적인 정체성과 싸우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자라는 것이다. 아이가 자라듯이 그렇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성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이루는 자가 되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자가 된다.

 

. 심판

1. 하나님의 공의

로마서 3 25-26절이 적용되는 것이다.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이게 십자가 사건이고, 회개하는 자가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십자가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곳이다. 정오에 하늘이 깜깜해졌다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한다. 죄인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다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러나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은 자라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죽은 자가 된다.

2. 백보좌 심판

『또 내가 크고  보좌와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앞에서 피하여   없더라  내가 보니 죽은 자들(네크루스)  자나 작은 자나  보좌 앞에  있는데 책들이  있고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르가)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백보좌 심판을 나타낸다.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심판을 하는 분에 대해서, 마태복음 16 27-28절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죽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심판받는 것이다. 요한복음 5 27-29절에서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빌립보서 2 9-10절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에 있는 자들과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심판은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신 호 로고스로 심령 속에 들어와 성도의 엣사람을 심판하는 것이다. 옛사람은 하나님 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다. 이게 바로 죄라는 말이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생명책이 심령 속에 들어서게 된다.  어린양의 생명책이 없는 자는 심판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심판받게 된다는 것이다. 네크루스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가 되어서, 사탄의 유혹을 뚫고 천년왕국을 이루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에르가는 사역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다. 

두 종류의 책이 있다. 어린양의 생명책과 다른 책들이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르가)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책들은 행위들에 대한 책들이다. 생명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들은 다른 책들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생명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생명책이 있음에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받아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은 다른 책들을 발견한 것이다. 다른 책들은  율법인 성경 책이다. 율법에 적용받는 자들은 율법에 따라 심판받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책이 있는 자들은 이미 첫째 사망의 심판을 받았으므로 둘째 사망의 심판이 없는 것이다. 

 3. 둘째 사망

요한계시록 20 14-15절에서, 『사망과 음부도 불못( 림네  퓌로스)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사망과 음부도 불못( 림네  퓌로스) 던져지니" 사망과 음부는 인간 내면의 심령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로 되어  있는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 속에 생명책이 있다. 생명책이 없는 자는 율법으로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받는다. 불과 성령으로 심판받는 것이 세례인 것이다. 세례는 죽음(사망)을 의미한다. 옛사람의 죽음이다. 옛사람은 심판받는다. 사망은 영적으로 죽은 (옛사람), 음부는 둘째 사망에 처해지는 자가 가게되는 곳을 의미한다.  림네()  퓌로스() 못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불은 성령의 불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불로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옛사람인가 아니면 생명책이 있는 새사람인가? 그의 생각과 믿음대로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신도의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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