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닮는 삶
그리스도를 닮는 삶
대부분 교회의 목사들은 설교후,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갑시다 라고 말을 한다. 이 말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들의
생각 속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 역시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자비로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남을 용서하는 등 구별된 삶을 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십자가의 죽음과 가까운 사랑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자는 취지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도들의 부활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은가? 로마서 6장 5절에서『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연합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하였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성도 역시 부활하였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시간에 관계없이 연합된다는 말이다.
대부분 목사들은 성도의 부활을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육체가 죽고, 그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교리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할지 몰라도, 부활은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의미로서,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는 죽고,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말한 것처럼 육체는 죽게되는 것이다. 부활은 이전의 것은 사라지고, 새창조물이 되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말하는 “예수를 닮는 삶”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기독교가 불교 등 다른 종교와 닮은 것이
있고, 차이가 있는 것이 있다. 타 종교, 특히 불교에서 기독교를 닮은 것은 남에게 선행과 자비를 행하라고 한다. 자기에게는
비우는 삶을 실천하라는 것이며, 그래서 신의 성품에 도달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을 실천하고, 남을 용서하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타인의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대부분 목사들이 말한다. 이 부분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종교 통합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배경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거룩은 다른 종교와 분명히 의미가 다른 것이며, 이것을 모르면, 교회에 앉아있으나, 불교의 설법을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되기도 하고, 한글
개역개정이 헬라어 성경을 정확히 번역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면이 있다.
첫째, 사랑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 5장 1-2절의 예를 통해서 신도 역시 이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인용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가운데서 행하라.』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이 신도들을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신도들도
이같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한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귀절을 동원해서 사랑을 실천해야만
한다고 부르짖는다.
에베소서 5장 1-2절을 헬라어를 번역해보면,
Γίνεσθε οὖν μιμηταὶ τοῦ θεοῦ ὡς τέκνα ἀγαπητὰ (1절)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미메타이μιμηταὶ)가 되고』(개역개정)
『그러므로 너희는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수정)
미메타이는 영어로 copy에
해당된다. 신도가 하나님을 어떻게 본을 받는가?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데, 본을 받는다는 것을
마치 훌륭한 사람의 행동을 본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신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자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는 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다.
καὶ περιπατεῖτε ἐν ἀγάπῃ, καθὼς καὶ ὁ Χριστὸς ἠγάπησεν ἡμᾶς καὶ παρέδωκεν ἑαυτὸν ὑπὲρ ἡμῶν προσφορὰν καὶ θυσίαν τῷ θεῷ εἰς ὀσμὴν εὐωδίας.(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페리파테이테)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개역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흠향할만한 향기와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 같이
사랑 안에서 걸으라.』(수정)
페리파테이테(περιπατεῖτε)는 걸어가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이다.『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걸어가라(페리파테이테)』이 부분은 5장 1절의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랑안에서(엔 아가페 ἐν ἀγάπῃ), 걸어가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을 깨닫고 신도 역시 육적으로 죽은
자임을 인정하고 소원할 때,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십자가) 안에서 걸어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교회 목사들은 계속 무엇인가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그 행동을 통해서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든
타 종교인이든 사랑의 실천은 누구나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연합이 없으면, 그 사랑도 의미없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근본적인
사랑은 죽어있는 영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적으로 예수와 함께 죽지 않고 신자들에게 사랑을 강요한다면
그게 가능하겠는가?
둘째, 거룩(베드로전서 1장 6절)에 대해서 살펴보면
레위기11장44절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이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가 거룩에 대해서 말을 한다.
διότι γέγραπται · ἅγιοι ἔσεσθε, ὅτι ἐγὼ ἅγιος.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개역개정) 한글 개역개정을 다시
헬라어를 바탕으로 다시 번역하면,
『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이니 너희들은 거룩으로 태어날지니라 하셨느니라
』(수정)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할 수 있는가? 대부분 목사들은
거룩을 완성할 수 없으므로, 겸손한 삶을 살거나 구별된 삶을 살아라고 한다. 영적으로 구별된 삶을 거룩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육적으로 구별된
삶을 강조한다. 살아가는데 먹는 것, 행동하는 것, 생활 태도 등을 바꾸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라는 말이다. 이런 생활을
하면 완전한 거룩에 미치지 못하지만, 거룩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을 원하시는데, 대부분 목사들은 거룩은 인간이
나아갈 방향일 뿐, 실제로 완전한 거룩이 될 수 없으므로 노력하자는 취지의 불완전한 거룩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거룩한데, 어떻게 인간이 거룩해질 수 있는가? 반문할지 모르나, 거룩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불
태우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인정해 주신다. 그래서 거룩한 자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요,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거룩이신데», 라는 표현에서 거룩하다 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하나님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 자체가 거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거룩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룩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을 어떤 상태로 묘사해서 인간들이 나가는 지침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은 인간이 측정할 수 없는 분야이다.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완전한 거룩을 원하신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 거룩인 것이다.
셋째는 본이 되는 삶에 대해서
디모데전서 4장 12-13절의 말씀을 근거로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을 한다. 헬라어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Μηδείς σου τῆς νεότητος
καταφρονείτω, ἀλλὰ τύπος γίνου τῶν πιστῶν ἐν λόγῳ, ἐν ἀναστροφῇ, ἐν ἀγάπῃ, ἐν πίστει, ἐν ἁγνείᾳ.ἕως ἔρχομαι πρόσεχε τῇ ἀναγνώσει, τῇ παρακλήσει, τῇ διδασκαλίᾳ.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아나스트로페)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아나그노세이)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개역개정)
『아무도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영과)
순결 안에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라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가르침에 전념하라.』(수정)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라는 말은 디모데의『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 안에서』라는 말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은 곧 목회자로서의 갖출 자질을 의미한다. 목회자들은『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 안에』있어야
함을 말해준다. 그 이유는 신도들이 목회자의 상황을 보고 진리에 있는 자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신도들도 이런 자질을 갖추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아나스트로페(ἀναστροφῇ)는 위에서 돌이키다 라는 의미다. 아나그노세이(ἀναγνώσει)는 아나(위에서)와 그노세이(아는 것:하나가 되는 것)의
합성어다. 위(하늘)에서
관계를 통하여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되는 것이다. 목회자가 반드시 전념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권하고,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본에는 ( )속의 영에 대한 것이 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라는 말은 비성경적인
말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이라고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삶이 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의 성장을 의해 도덕적으로 불교
등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용서(자비)의 실천, 선행 등을 실천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이런 닮는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와 연합되는 자의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타 종교와 같은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있는가?
육적인 자기의 정체성을 버리고, 예수와 부활한 성도로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영적인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놀라운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단한 복음을 널리 알리는 것이
성도의 삶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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