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쟁
영적 전쟁
영적 전쟁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영적 전쟁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그 대상에 대해 거의 대부분 사탄 또는 악한 영으로 말할 것이다.
영적 전쟁도 육적인 전쟁과 마찬가지로 피아식별을 할 줄 모르면 전쟁에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을 하게 되는 나는 누구이며, 그 대상은 누구와 싸우는가를
알지 못하면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유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기라는 정체성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모르면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나타나는 자아는 바로 육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 육적 자아는 대략 일곱가지의 특성을 갖는 집합체 형식으로 되어있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발전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 자아는 하나님과는 적대적인
대립을 세우기 때문에 육체 속에 갇혀있는 영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거부한다.
우리는 영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바르게 설 수 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육체와 영이 결합된 존재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영은 흙이라는 육체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을 하자면, 세상에
살다가 죄를 범하여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어떤 사람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세상에서 입던 옷과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번호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일정기간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감옥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죄수복에 적힌 번호가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 속에 갇힌 영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육체 속에 갇혀 있으며, 혼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감옥 속에 갇혀있는 자가 자신의 이전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부모를 기억하고 자신이 살던 집을 생각하고, 함께 살아온 가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만 영적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씨뿌리는 비유로 설명한다. 흙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경작하면서 생명의 싹이 자라듯이 육체
속에 갇힌 영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묵상과 성경의 말씀을 읽으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말씀을 하기를 영이 육체 속에 갇힌 근본적인 원인은 영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그게 탐심이며,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죄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죄인은 두번 죽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죽고 죽으리라) 하시니라. 한글 번역 성경은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은 죽고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두번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나 흙에 갇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자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게 회개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첫번째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물세례이다. 로마서 6장 3-7절에서
세례와 죄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사람은 스스로 죽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십자가의 죽음으로 회개하는 인간들을 대속하는 것이다. 단지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것 뿐만 아니라, 함께 죽었음을 믿게 하여 죄인도 역시 죽으므로 죄를 사면받게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성도가 된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백보좌 심판은 율법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된다.
두번째 죽음은 혼의 죽음이다. 이것은 불세례이다. 이전의 옷을 벗고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혼은 육체와 영이 만나서 인간이 되는 가죽옷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첫사람
아담에게 입혀주신 옷이다. 그런데, 이는 육체로 비롯된 옷이므로, 그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성령세례인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자는 새로운 옷(영의 몸)을 입으므로 영이
빛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3-44절에서는 영의 몸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설명하였다. 영의 몸을
부활한 자의 몸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육체가 있으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자신이 부활한 자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옷을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한 것을 믿을 때,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 이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셋째 하늘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게 재림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는 성도의 심령 속에 천국이 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육체로부터 나타난 자기의 정체성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자기 정체성이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피아식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참된
나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정체성이고, 나의 적은 다름 아닌 육으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대상은 육적 자아이며, 부인해야 하는 주체는 영적 자아인 것이다. 이 둘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영에 대해서 감옥과
같은 곳이다. 세상에도 감옥을 관리하는 자가 있다. 교도소장이
있으며, 부하 직원도 있을 것이다. 죄수를 법으로 통제하고, 불법을 저지를 때는 법으로 처벌하고, 노역도 시킬 수 있다. 영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죄인에 대해서 악역을 맡은 공무원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도소장은 사탄, 그 밑에 있는 자들은 악역을 맡은 천사들이다. 그래서 어두운 영(마귀 등)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자신이 맡은 바 역할을 다 할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에 대해서 두 번 죽은 자에 대해서는 세상(교도소)을 떠나기 전이라도 죄없음을 인정하는 도장을 찍어준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악역을 맡은 간수들이 더 이상
간여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육체로 인해서
세상에 살아갈 뿐인 것이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1서 5장 18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다만,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났더라도, 사탄이나 어두운 영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육적 자아가 괴롭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대로
결과가 주어진다. 성경을 로고스로 받느냐 아니면 글자 그대로 레마로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성령의 능력으로 로고스로 받을 때는 율법에서 벗어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지만, 레마로 받을 때는 여전히 율법 속에 있는 자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사탄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율법 속에
있는 자는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자에게 영적 전쟁이란 말이 어울리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성도에게는 영적 전쟁의 대상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전쟁이고, 두번째는 육적 자아에 대한 전쟁이다.
첫째 거짓선지자에 대한 전쟁이다. 마태복음 7장 15절에서『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오늘날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는 자들일 것이다. 왜곡된 성경 말씀은 잘못된 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경우, 잘못된 교리와 의도적 왜곡 등을 들 수 있겠다.
열왕기상 22장 1-40절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람나라와 전쟁을 하여 전략 요충지인 길르앗 라못을 빼앗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여호사밧이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를 물어보았다. 아합이
자기를 지지하던 400명의 선지자를 모으고 물었을 때, “그들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라고 했다. 여호사밧이 이외에 우리가 물어볼만한 선지자가 없느냐 라고 하니, 아합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 선지자가 있으니 저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미가 선지자에게 물으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다”라고 예언을 했는데, 미가의 말을 믿지 않고, 숫적으로 많은 400명의 선지자의 말을 믿고 나가서 전투를 하다가 아합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 중에 경력이 화려하고 말솜씨는 뛰어나지만 진리를 전파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진리를 전파하지 않으면, 모두 거짓 선지자가 된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을 하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예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옛사람이 죽고(물세례), 불세례로 혼에 대해서도 죽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성령 세례로 하늘로부터 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에 대해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율법을지켜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한다고 가르치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나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절기도 잘 지켜나가야 하고,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인 것이다. 이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에 오셨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규칙, 규정은 때로는 필요하지만, 구약의 율법처럼 강제적으로 규정화하여 사람들에게 멍에를 씌운다면 모두가 율법주의자들이 된다.
그리고
기복신앙으로서 마치 구약시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라 우상에게 빌었듯이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세상의 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만연된 기복신앙이다.
두번째는 육적 자기와의 전쟁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 성도가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도 인간의 육체로 비롯된 일곱가지의 육적인 모습은 쉽게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의 전쟁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인공지능 등이다. 이전의 “나” 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 일곱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엘로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도가 되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이 일곱가지의 악한 모습을 부셔야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고 가신다. 신명기 7장 1-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이스라엘이 극복해야 되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극복해야만 할 영적 전쟁이
되는 것이다.
1) 헷 족속(히타이트)
헷 족속은 공포와 두려움을 의미한다. 헷족속은 가나안에서 크고 강대한 민족으로 B.C.10세기에는 철기문명을 가지고 성장하며 이스라엘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민족이었다. 인간의 육적인 내면의 모습을 보면, 남을 지배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다. 이것이 발전되면, 폭력으로 전쟁으로 나아간다.
2) 기르가스 족속
진흙탕이라는 의미로,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혈연관계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다.
3) 아모리 족속
산위에 있는 자라는 의미로 지식, 학문을 뜻한다. 아모리 족속의 인본주의를 상징한다. 인본주의는 인간 자신의
가치와 지식을 최우선으로 하는 학문이다.
4) 가나안 족속
낮은 땅이라는 의미로 저주를 상징한다. 따라서 저주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높히기 위해 저주와 상반된
개념을 만들고 이것이 발전되면 비전과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5) 브리스 족속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낮은 자존감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애를 쓰는 자의 상징이다. 이
세상을 살다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자들이며, 그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삼으려고 한다.
6) 히위 족속
쾌락주의 향략주의를 상징한다. 본성적으로 인간의 육적 내면에는 성적 욕구가 있다.
7) 여부스 족속
짓밟다(타작마당)는 뜻으로, 억압(증오, 원망, 불평)을 상징한다. 인간은 누구로부터 억압을 받을 때, 도피의 수단으로 종교적인 수단을 활용한다. 인간의 종교심은 내면의
평화를 도모하고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신을 만들어, 내면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인간의 육적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첫째 육체의 본성은 감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물질 소유와 성적인 만족감을 채우려는 것이 가장 핵심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극히 조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세상(물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며, 간음하지 말도록 규정하기도 한다.
둘째, 혈연관계에서, 아무래도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자녀를 우상처럼 여길 때, 가족관계는 파탄될 수 있다. 그만큼 심각하다. 가정을 유지하는데, 자녀는 핵심요소이지만, 지나치게 우상처럼 여긴다면 오히려 파탄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셋째, 경험과 지식은
영적 신앙생활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적적인 부분이 많다. 사도바울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였다. 그와 같은 기억은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 가장 힘든 기억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한 높은 지식은
하나님 말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사상과 이념은
종교를 부인하고 탄압하는데, 동원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공산 독재주의가 그러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다.
다섯째, 종교심은 신을
찾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심은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끌기도
한다.
여섯째, 자기의 의인데, 선행을 행하고, 자기 규칙을 만들어서 불법을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스스로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한다. 그들은 나아가 스스로 선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사람부터 주목받기를 원하며,
심지어 남을 판단할 때도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일곱째,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항상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남보다
못하면 분노하며, 심지어는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며, 이간질을
하거나, 함정을 파서 넘어뜨리기도 하며, 상대방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상대를 죽이기도 한다. 언어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성도라 할지라도 심령 속에 견고하게 진을
만들고 있는 이 영적 일곱 족속을 부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대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장면과 작은 성 아이 전투에서 패배한 사례를 통해서 조금은 이해될 수 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호 로고스)과 성령의 능력만이 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탄 마귀 귀신 천사는 하나님의 천사이며 그 역할만 다를 뿐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부터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있으므로 죄인이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두운 흙속에 있으므로 사탄과 연합된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를 지배하는 영은 복음의 천사가 된다. 사람의 상태에따라 천사도 지배하는 천사(사탄)가 되는가, 아니면 돕는 천사가 되는가의 차이인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